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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야 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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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주제일교회 작성일 18-09-16 18:12 조회 168 댓글 0
 
첨부 180916설교b.mp3 (22.9M) 11회 다운로드 DATE : 2018-09-17 09:01:20

함께 살아야 할 사람들(누가복음 10:29-37)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있어야 할 만물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흙, 곧 티끌로 사람, 아담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2:18,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겠다.”그리고 주 하나님이 그 남자를 깊이 잠들게 하셨습니다. 그가 잠든 사이에, 주 하나님이 그 남자의 갈빗대 하나를 뽑고 그것으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2장에서의 여자를 만듦은 그런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신 것은, “남자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겠다.”하여 여자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럴 때에 “돕다”의 히브리어는 ‘에제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도우실 때 쓰는 단어입니다. 창세기 49:25, “너의 조상 하나님이 너를 도우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너에게 복을 베푸시기 때문이다.” 이럴 때에 “도우시고”는 ‘에제르’입니다. 그 외에 사람이 사람을 돕는 것은 ‘야솨’, ‘쿰’이라는 히브리어를 사용했습니다.(출 2:17, 삼하 14:4, 신 22:4) 그러니까 ‘돕는 배필’이라고 해서, 그냥 일방적으로 여자가 남자를 돕는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여자가 남자를 돌본다’는 의미가 더 큽니다. 분명한 것은 ‘서로를 위하도록’ 만들어진 존재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처음부터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남을 돕기도 하고, 도움도 받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사람의 생활이요, 사람의 삶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4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13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말씀에 “아멘!” 하고선 친구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누가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을 수 있을까?’ 하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립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는 또 다른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남의 염병이 내 고뿔만도 못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 작은 일로 인해 남의 큰일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무슨 말입니까?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하고 되물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여러분에게 있어 어떤 사람입니까? 정말 아무 이해관계 없이 만나는 사람입니까? 뭔가 내게 유익이다 싶어서 만나는 거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46-47,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여기, 세리는 당시 유대 사람들이 엄청 싫어했던 사람입니다. 아예 세리를 죄인으로 취급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마치 그들이 싫어하고 미워하는 세리만도 못하다는 겁니다. 여기, 이방 사람들도 유대 사람들은 엄청 싫어했습니다. 이방 사람은 아예 사람 취급도 안 했습니다. 그러니까, 내 형제자매들과만 인사하고, 다른 사람들과 인사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사람취급도 안 한 이방 사람만도 못하다는 겁니다.

 

이 말씀은 이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그랬다는 겁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유대 사람들이 그랬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천 년이 지난 지금은 어떻겠습니까? 세상이 그렇습니다. 자기 밖에 모릅니다. 자기 나라 밖에 모릅니다. 모두들,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힘이 있다고 확신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지려고 합니다. 많이 가지면 굳이 남에게 도움을 받을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함께 살아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럴까요? 정말 사람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살 수 있을까요? 마트에 가면, 혼자서 해먹을 수 있도록 만든 음식재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혼자 살 수 있다는 게 아닙니다. 혼자 음식을 만들어 먹고, 혼자 생활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고 해서 혼자 살 수 있다는 게 아닙니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남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삽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보면, 늘 디모데후서 3장이 생각납니다. 디모데후서 3:1-5, “그대는 이것을 알아두십시오. 말세에 어려운 때가 올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뽐내며,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며, 부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감사할 줄 모르며, 불경스러우며, 무정하며, 원한을 풀지 아니하며, 비방하며, 절제가 없으며, 난폭하며, 선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무모하며, 자만하며,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며,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경건함의 능력은 부인할 것입니다. 그대는 이런 사람을 멀리하십시오.” 그런데 이것이 어디 남들만 그렇습니까? 나는 안 그렇습니까?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 문제인 줄 모르는 겁니다. 세월이, 시대가 그래서 그런 줄 아는 겁니다. 오히려, “그대는 이런 사람을 멀리 하십시오.” 그래서 그런 사람을 멀리하려고만 합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을 멀리하고 사는 지금 이 시대가 말세의 어려운 때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고통의 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예수님의 말씀이 자꾸만 생각이 납니다. 우리는 왜 이래야 하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자꾸만 생각이 납니다.

 

어느 날,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님을 시험하여 말하였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여기, “시험하여”라는 말은 그 사람에게 불순한 의도가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배우겠다는 마음도 아니면서 질문하는 겁니다. 혹시라도 예수님께서 실수라도 하기를 바라서 한 물음입니다. 의외로 이런 사람이 많습니다. 조금이라도 남보다 더 많이 안다고 스스로 여기는 사람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 이 예수님의 물음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그 율법을 어떻게 읽고 있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따지고 들면, 여기 율법은 구약의 오경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록한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내게 직접 주시는 말씀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율법, 곧 성경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습니까?”

 

율법교사가 대답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 율법교사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구약성경의 그 넓은 범위에서 이 말씀을 가려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예수님께서도 그를 인정하셨습니다. “네 대답이 옳다.” 그렇습니다. 성경을 압착기에 넣고 힘을 가해서 꾹 짜면, 그래서 나오는 것은 사랑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를 새벽마다 읽기 시작하였는데, 처음부터 사랑 이야기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습니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지만, 살려두셨습니다. 아담에게서 가인과 아벨이 태어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고 해서, 가인은 아벨을 죽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난 가인의 후손들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창세기 6:5-6, “주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여기 보십시오. 처음부터 잘못된 사람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정작 죽어야 할 사람들이 죽지 않고 세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들을 주셔서, 그를 믿으므로 구원을 얻는 것은 방법입니다. 그렇게 하신 동기가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어림없습니다.

 

에베소서 2:1, “여러분도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러나 4-5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범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보다,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가 먼저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무엇을 읽습니까? 그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를 먼저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내 목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보아야 할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그 사랑으로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사랑이 없으니, 아무리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셔도 못하는 겁니다. 아무리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 하셔도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율법교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알고 있는 것도 대단한 겁니다. 그렇게 대답할 수 있다는 것도 대단한 겁니다. 그러나 지켜야 합니다.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이럴 때에,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오직 한 분밖에 없으시니까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래도 하나님을 사랑하니까요. 그러나 문제는 ‘누가 내 이웃이냐?’ 하는 겁니다. 사실, 가는 길 멈추고 그 사람을 돌봐주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다가 약속시간에 늦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다가 귀찮은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기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 강도 만난 사람을 못 보았을까요? 당연히 보았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는 것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제사장이요,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시체를 만지면 안 됩니다. 만일 가까이 가서 돕다가 죽은 사람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이들에게는 정말 중요한 일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돕는다고 했다가 그 중요한 일을 망칠 수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누가복음 14:15 이하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잔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진작 초청한 사람들에게 종들을 보내어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모두 일이 있답니다. 한 사람은 밭을 샀기에 가서 보아야 한답니다. 또 한 사람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시험하러 가야 한답니다. 또 한 사람은 장가를 들어서, 아내를 맞이하였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들의 말은 다 정당하지 않습니까? 자신에게 닥친 중요한 일을 다 팽개치고 오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잔치집 주인에게야 나중에라도 만나서 인사하면 되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결국 이들은 그 잔치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말은 다 맞는데, 어떻든 잔치 음식을 먹지 못했습니다. 결국 하나님 나라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놓친 겁니다. 결국 구원을 받지 못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도 마찬가지로 얼마나 많은 핑계를 대는지 모릅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에 대해서 핑계를 댔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하 15:2-3, “만군의 주가 말한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한 일 곧 길을 막고 대적한 일 때문에 아말렉을 벌하겠다. 너는 이제 가서 아말렉을 쳐라. 그들에게 딸린 것은 모두 진멸시켜라. 사정을 보아 주어서는 안 된다.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와 젖먹이, 소 떼나 양 떼, 낙타와 나귀 등 무엇이든지 가릴 것 없이 죽여라.” 그랬는데, 사울 왕은 그 백성은 모조리 칼로 쳐서 없애버리면서도, 아각 왕과 양 떼와 소 떼 가운데서도 가장 좋은 것들과 가장 기름진 짐승과 어린 양들과 좋은 것들은, 무엇이든지 모두 아깝게 여겨 진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찾아온 사무엘이 그를  책망했습니다. 그러자 사울 왕이 핑계를 댑니다. “그것은 아말렉에게서 빼앗은 것입니다. 우리 군인들이 예언자께서 섬기시는 주 하나님께 예물로 바치려고, 양 떼와 소 떼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들을 남겼다가 끌고 왔습니다. 그 나머지 것들은 우리가 진멸하였습니다.” 우와! 이럴 수 있습니까? 남자와 여자, 어린 아이와 젖먹이까지 죽였으면서도 양 떼와 소 떼가 아까워서 남겼답니다. 그것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가져왔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것에 대한 핑계인 겁니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다니엘의 세 친구들, 그들은 왕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금 신상에 절하라는 걸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 않으면 불타는 화덕에 던져지는 왕의 법이 있음을 알고도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불타는 화덕에 던져 졌습니다. 보십시오. 이건 얼마든지 핑계 댈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꼭 죽어야 할 까닭이 어디 있습니까. 눈 딱 감고 절 한 번 하면 되는 건데 말입니다. 그리고 살아서 열심히 신앙생활도 하고, 하나님의 일도 하고 그러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불타는 화덕에 던져 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살리셨습니다. 불속에 들어갔다가 나왔는데도, 머리카락 하나도 그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니엘. 다니엘을 시기한 사람들이 왕에게서 조서 하나를 받아냈습니다. 앞으로 삼십 일 동안, 왕 외에 다른 어느 누구에게 무엇을 간구하는 사람은 사자 굴에 던져 넣으라는 겁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자기 다락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어놓고 보란 듯이 기도합니다. 그래서 다니엘을 시기한 사람들이 보란 듯이 그를 잡아갔습니다. 예, 다니엘은 얼마든지 핑계를 댈 수 있습니다. 이제 다니엘은 바빌로니아의 정승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막강한 힘으로 동족들에게 많은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죽은 것보다 살아있는 것이 모두에게 훨씬 유익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핑계 댈 수 있습니다. 겉으로 소리를 내지 말고 속으로 기도해도 됩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지 않고 닫아놓으면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모른다’ 하시겠습니까? 책망하시겠습니까? 그런데도 다니엘은 핑계 대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잡혀갔고 사자 굴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사자 굴에서 다니엘을 살리셨습니다.

핑계 대지 마십시오. 예배드림, 기도,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 등등 우린 너무 핑계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핑계 대봐야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냥 그 때마다 그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보십시오, 여기 사마리아 사람. 따지지 않았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내가 도와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을지, 이런 것 저런 것 따지지 않았습니다. 망설이지도 않았습니다. 핑계대지 않았습니다. 33절,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예, 측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럼요, 아마 그런 상황의 사람을 보면 누구나 측은한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비켜간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도 측은한 마음이 생겼을 겁니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34-35절,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다음 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서, 여관 주인에게 주고,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 하였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그렇게 했습니다. 이 강도 만난 사람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이방 사람인지, 사마리아 사람을 그토록 싫어하는 유대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사실, 그건 그리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 많은 걸 따집니다. 평소 그 사람이 내게 어떻게 했는가를 따집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인가를 따집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의 관계까지 따집니다. 내가 지금 바쁜지 아닌지도 따집니다. 심지어, ‘아마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일 거야. 그래서 저런 일을 당했나 봐.’ 그리고선 그냥 가버리기도 합니다. 제발 따지지 마십시오. 그냥 측은히 여기십시오. 그냥 불쌍히 여기십시오. 그리고 도와주십시오. 사랑하십시오. 마태복음 7:1-2,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너희가 남을 심판하는 그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요,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되어서 주실 것이다.” 그러니까요, 우리가 그렇게 따지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서 그렇게 따지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것이 있을까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율법교사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이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여러분은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이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예, 율법교사도 그리 말했습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예, 이제 우리도 그렇게 합시다. 그러나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기 사마리아 사람이 한 것을 보십시오.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로 상처 난 곳에 붓고 여관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 곁에 붙어서 간호한 것도 아닙니다. 아침에 두 데나리온을 여관 주인에게 주고 부탁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입니다. 이정도면 우리도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모두 죄인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은 언제나 악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도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사야 6:5,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서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 그러니까요, 이사야 자신도 입술이 부정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살고 있는 그 주변의 모든 사람들도 입술이 부정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도와야 합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고, “왜 나를 도와주지 않느냐?”고 말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라고 하셨습니다. 난 강도 만난 사람이니, 난 가난한 사람이니, 난 병든 사람이니, 그래서 당연히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강도 만난 자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 같으나 부요한 사람이며, 병든 사람 같으나 건강한 사람이며,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 같으나 넉넉하게 도울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마음이 없다는 겁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도, 마음이 없어서 못하는 겁니다. 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못하는 겁니다. 아직도 내가 남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남강을 건너는 것, 누군가가 이미 다리를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의 도움도 없이 남강을 건넌다고 우쭐 대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 이 길은 정말 험한 길입니다. 깊은 골짜기 길입니다. 인적이 드문 길입니다. 그래서 강도가 많이 나타나는 곳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그렇습니다. 어느 누구도, 강도 만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을 걷는 것이 오늘 우리들이 삶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살려내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 돕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함께 살아야 할 사람인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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