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함께
행복한 교회, 행복한 가정, 행복한 사회





예배와말씀
주일설교    |  예배와말씀  | 주일설교
그리스도인의 가치와 영향력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으로 보내기
  • 밴드로 보내기
작성자 진주제일교회 작성일 18-09-09 17:36 조회 73 댓글 0
 
첨부 180909설교c.mp3 (22.9M) 4회 다운로드 DATE : 2018-09-09 18:26:53

그리스도인의 가치와 영향력(요한복음 1:9-14)

 


어떤 아들이 아버지를 죽였습니다. 그래서 팔 년이라는 실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상소했답니다. 그래서 이 심 재판이 열렸는데, 여기서는 징역을 십이 년으로 판결했습니다. 그러니까, 사 년이 더 붙은 겁니다. 궁중족발 사건이 있습니다. 가게를 빌려 족발 집을 했는데 오 년 만기가 되었답니다. 그런데 집 주인이 임대료를 네 배나 올렸답니다. 그래서 족발 집 사장이 화가 나서 집주인에게 망치를 휘둘렀답니다. 물론, 그 안에도 서로가 주장하는 이해관계가 있을 겁니다. 우리 사회가 그렇습니다. 걸핏하면 폭행이고, 걸핏하면 살인입니다. 여러분은 뭐가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시대가 문제입니까? 사회가 문제입니까? 소위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문제입니까? 무엇보다 더 큰 문제는 사람이 사람답지 않게 여겨진다는 겁니다. 사람의 가치가 소중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지 못합니다. 사람의 존재가치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릅니다. 있다면 돈으로 계산하는 겁니다. ‘얼마를 가졌느냐?’로 계산하는 겁니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풍성합니다. 아무리 못 살겠다고 아우성을 쳐도 잘 사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만치 살려면 그만치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만치 벌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사람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떨어집니다. 오래 전 이야기지만, 서울의 어느 중고등학교에 장학금이 나왔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누구를 주어야 할지 모르겠더랍니다. 가난한 아이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아파트 평수가 작은 집 아이들에게 주었답니다. 그래도 그 아파트는 서른 몇 평이나 되는 아파트였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논란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장애인 특수학교를 지으려고 하는데 동네 사람들이 반대했습니다. 그 어머니가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래도 안 되니, 시에서 그 동네에 뭔가 해주기로 하고 학교 건축을 하기로 타협했습니다. 그러자 장애우 부모들이 걱정합니다. 이것이 전례가 된다는 거지요. 앞으로 어디서든 이런 학교를 지을 때마다 그 지역에 뭔가 해주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겁니다.

 

왜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되지 못할까요? 그것은 돈이, 가졌다고 하는 것이, 그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건 예수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외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도 않습니다. 아무 감동도 없습니다. 내가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가 내가 판단하는 내 가치입니다. 그건,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가졌느냐가 그 사람의 가치입니다. 같은 교회를 다녀도, ‘저 사람이 내게 얼마나 유익이 될까?’ 하는 것이 그 사람을 사귀고 싶은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내게 이득이 될까 싶은 사람에게는 가까이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멀리까지는 안 해도, 가까이 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야고보서 2:1-4,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지 마십시오. 이를테면, 여러분의 회당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금반지를 끼고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도 들어온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면서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거기 서 있든지, 내 발치에 앉든지 하오’ 하고 말하면, 바로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고, 나쁜 생각으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지금 이 야고보서를 일반 사람에게 한 말이라고 여기지 마십시오. 회당에 있는 사람,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에 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이 그렇게 차별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5절,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그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예,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택하지 않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그들을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별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9절, “그러나 여러분이 사람을 차별해서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요, 여러분은 율법을 따라 범법자로 판정받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에게는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는 겁니다. 그 사람에게 존귀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죄인이지만, 그 사람 역시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 또한 사랑하십니다. 마태복음 5:45,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이러면 어떤 사람은 맞장구를 칩니다. “그래, 맞아. 예수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똑같아.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고, 똑같이 비를 내려 주셔.” 그렇습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예수 믿는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똑같다면 왜 우리가 이 시간에 여기에 나와 앉아 있습니까? 아닙니다. 똑같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모두를, 누구든지 사랑하신다는 것은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는 사람들도 사랑하시고, 안 믿는 사람들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예수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됩니다. 만약 예수 안 믿는 사람에게 십자가는 아무 소용이 없다면 여러분과 저는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예전엔 예수님을 알지도, 믿지도 않았던 사람이니 말입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 우리의 신분과 우리의 가치가 달라졌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러자 우리의 신분이 달라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9-12절,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분명히 그 빛은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나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로마서 8:14-16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바로 그 때에 그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지각과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말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저, 예수 믿었으니 구원을 받았나보다 합니다. 그저, 예수 믿었으니 하나님의 자녀인가 보다 합니다. 그런데 그 정도일까요? 그러면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럴 때에 섭리라는 말은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원리와 법칙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섭리자이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땅과 후손을 약속하신 하나님.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는 백성들은 자기 것으로 삼으셔서, 그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신 하나님. 그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광야 사십 년을 지키시고 돌보신 하나님. 그러면서도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에게 벌과 저주를 내리신 하나님. 끝내 그 백성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배와 섬김을 말씀하신 하나님. 그러나 그것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때에, 자기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그 아들의 생명을 받으시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주심을 약속하신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그리고 무한한 약속을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곳곳마다 말씀합니다. 베드로전서 5:7, “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기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로마서 8:17,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입니다.” 로마서 8:28,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고린도후서 6:8b-10, “우리는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는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믿어집니까? 정말로 믿어집니까? 사람이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집니까? 그러나 믿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1:9-14, “그러므로 우리가 여러분의 소식을 들은 그 날부터, 우리도 여러분을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채워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일에서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고, 모든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점점 더 알고, 하나님의 영광의 권능에서 오는 모든 능력으로 강하게 되어서, 기쁨으로 끝까지 참고 견디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도들이 받을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여러분에게 주신 아버지께, 여러분이 빛 속에서 감사를 드리게 되기를 우리는 바랍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암흑의 권세에서 건져내셔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우리는 그 아들 안에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에게 엄청난 약속을 하셨습니다. 심지어 우리 죄를 씻어서 자유롭게 하고, 영원한 죽음에서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아멘? 아멘 하려니 실감이 안 나지요? 아직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는 이 말씀이 다 무슨 말씀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끝까지 가면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선언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3:16,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물론 이 말씀은 그 당시 고린도 성도들에게 몸가짐을 잘 지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 정도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몸가짐만 잘 하면 되겠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스겔 10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을 떠납니다. 19절, “그룹들이 내가 보는 데서 날개를 펴고 땅에서 떠올라 가는데, 그들이 떠날 때에, 바퀴들도 그들과 함께 떠났다. 그룹들은 주님의 성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에 머무르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 위에 머물렀다.” 그리고 22절, “또 그들의 얼굴 형상은, 내가 그발 강 가에서 본 바로 그 얼굴이었다. 그들이 각각 앞으로 곧게 나아갔다.”그리고 43:1-5에서, 그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오십니다. “그 뒤에 그가 나를 데리고 동쪽으로 난 문으로 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으로부터 오는데, 그의 음성은 많은 물이 흐르는 소리와도 같고, 그 모습이, 내가 본 환상, 곧 주님께서 예루살렘 도성을 멸하러 오셨을 때에 본 모습과 같았으며, 또 내가 그발 강가에서 본 모습과도 같았다. 그래서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그러자 주님께서 영광에 싸여서, 동쪽으로 난 문을 지나 성전 안으로 가셨다. 그 때에 주님의 영이 나를 들어 올려, 안뜰로 데리고 갔는데, 주님의 영광이 성전을 가득 채웠다!” 이제 성전은 건물로 세워진 그냥 성전이 아닙니다.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 채워진 성전입니다. 그 영광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영광입니다. 그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이사야 6:1-5,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차 있었다. 그분 위로는 스랍들이 서 있었는데, 스랍들은 저마다 날개를 여섯 가지고 있었다.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둘로는 날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화답하였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우렁차게 부르는 이 노랫소리에 문지방의 터가 흔들리고, 성전에는 연기가 가득 찼다. 나는 부르짖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 그곳이 성전입니다. 우리는 성전이라고 하면 늘 예배당만 생각해서 그 성전이 어느 정도이지 상상도 못합니다. 그러나 성전은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 채워진 곳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성전이라는 말씀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채워졌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님과 함께 우리 안에 들어오셨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성령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심을 믿잖아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과 함께 하심을 믿으세요. 그리고 그 영광 또한 여러분 가운데 가득 채워졌음을 믿으십시오. 그런데 이 영광이 아무에게나 채워집니까? 아닙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 이사야도 이제 죽었다고 부르짖습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랍 중 하나가 제단의 숯불을 가져다가 이사야 입에 대면서 말했습니다.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악은 사라지고, 너의 죄는 사해졌다.” 그래서 이사야는 살아난 겁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도 아무렇지 않습니까? 죽지 않습니까? 예, 죽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호칭은 아무 곳에 붙일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죄 용서함을 받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2:38에서 베드로가 말씀합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를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함을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이럴 때에,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는 말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20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나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내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겁니다. 그분이 내 생각과 의지와 자아와 행동을 주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고, 그래서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채워졌습니다. 이제 나는 죽었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채워지는 것, 이것이 성령 충만한 상태인 겁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악한 영들과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질병과도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를 실패하게 하는 것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를 염려하게 하고 걱정하게 하고 두렵게 하는 것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그런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그런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엄청난 가치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4:7-10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뭐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깨달았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찬 성전인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그 성전에서 물을 흘러납니다. 그 물은 생명수입니다. 에스겔 47:1-2, “그가 나를 데리고 다시 성전 문으로 갔는데, 보니, 성전 정면이 동쪽을 향하여 있었는데,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의 오른쪽에서 밑으로 흘러 내려가서, 제단의 남쪽으로 지나갔다. 또 그가 나를 데리고 북쪽 문을 지나서, 바깥으로 나와, 담을 돌아서, 동쪽으로 난 문에 이르렀는데, 보니, 그 물이 동쪽 문의 오른쪽에서 솟아 나오고 있었다.”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그 물이 흘러가는 주변의 물들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사해, 곧 죽은 바다라고 이름이 붙은 사해도 살아났습니다. 강 주변에 있는 나무들이 철따라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그 잎은 민족을 고치는 약재로 쓰였습니다. 어디서 나온 물이 그렇게 했습니까? 예, 성전입니다.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성전인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늘 말씀드렸지만,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살리기 위해 싸우는 겁니다. 악한 세상을 선한 세상으로 바꾸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성전인 우리에게서 생수가 흘러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을 살려야 합니다. 이건,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보십시오. 생명의 물이 흐르는 곳마다 살아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렇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그런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소위 말해서, 영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야 합니다. 충만하게 채워야 합니다. 저는 언제나 우리 성도들이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기를 기도합니다. 지식으로 영향력이 있어야 합니다. 돈으로도 영향력이 있어야 합니다. 건강으로도 영향력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영향력이 있어야 합니다.

 

창세기 39:3-4, “그 주인은,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시며, 요셉이 하는 일마다 잘 되도록 주님께서 돌보신다는 것을 알았다. 주인은, 요셉이 눈에 들어서, 그를 심복으로 삼고, 집안 일과 재산을 모두 요셉에게 맡겨 관리하게 하였다.” 예, 하나님께서 그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셔서 그리 되었습니다. 그렇게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의 직장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의 사업장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잘되게 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새벽에 우리는 에스겔 48장을 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포로로 잡혀 있는 사람들에게 옛 땅의 회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지파 별로 그 땅을 다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땅 가운데 성읍을 만들고, 그 가운데 성소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여호와 삼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에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곳에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삶과 신앙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성전인 것도 믿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 새벽에 사무엘상 4장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과 전쟁을 했습니다. 그런데 졌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가져와서 그 궤를 앞세웠습니다. 그러나 졌습니다. 언약궤는 빼앗겼고,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엘리제사장도 죽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며느리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에 계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리면 하나님의 궤조차도 나무상자에 불과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14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그렇습니다. 세상을 만드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바로 여기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여호와 삼마’, 하나님께서 여기에, 이 예배 가운데, 예배드리는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그것은 곧 외아들의 영광, 그 은혜와 진리로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하심입니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우리는, 엄청난 가치를 가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이제 이 믿음으로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을 통해 곳곳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줄 믿습니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목회단상
금주의 찬양
교회주보

인사말씀

비전및표어

예배안내

교회연혁

섬기는분들

오시는길

포토앨범

교회소식

행사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