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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으로 우리는 행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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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주제일교회 작성일 18-08-26 18:36 조회 100 댓글 0
 
첨부 18.08.26.오전설교c.mp3 (22.7M) 5회 다운로드 DATE : 2018-08-26 19:39:47

무엇으로 우리는 행복할까?(시편 1:1-6)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행복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또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우선 여러분에게 물어봅시다. 여러분은 무엇을 행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여러분이 어떤 상황에 있을 때에 행복하다고 느낄 것 같습니까?

 

‘소확행(小確幸·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1994년에 쓴 수필집 3권, <랑겔한스 섬의 오후>에서 처음 나온 글입니다. 이 책 안에 “소확행”이라는 제목으로 이런 글이 있습니다.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돌돌 말은 깨끗한 팬티가 잔득 쌓여 있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 작기는(小) 하지만 확(確)고 한 행(幸)복의 하나(줄여서 소확행)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데, 이건 어쩌면 나만의 특수한 사고 체계인지도 모른다.” “또 런닝셔츠도 상당히 좋아한다. 막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퐁퐁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 쓸 때의 그 기분이란 역시 소확행의 하나이다.” 이럴 때에 ‘작기는 하지만 확고한 행복’을 소확행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럴까요? 그러면 행복할까요? ‘작은 일에서도 확고한 행복을 누리자’고 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럼으로 해서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것도,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함으로 행복할까요?

 

1983년 3월에 나온 책이 있습니다. <성서 속의 인물상>이라는 책인데,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다가 생각이 나서 책꽂이를 살피니 있는 겁니다. 그 안에 “행복을 찾아서”라는 작은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거기에, 행복이라는 말을 네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첫째는, 쾌락이며, 즐거움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여러 가지 감각을 자극함으로써 일어나는 감정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이 살기 위해서 필요하고 소중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목적은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다’라고 하면, 거기엔 새로운 문제가 생깁니다. 사람이 쾌락을 추구할 때에는 만족보다 더 자극이 강한 쾌락으로 확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만족이 아니라 실망하게 됩니다.

 

둘째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행복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만족입니다. 이것은 정신적인 것도 포함합니다. 한 쌍의 남녀가 사랑하고, 자기들의 보금자리인 가정을 꾸며 나가는 것, 거기에다 사랑하는 상대에게 헌신하고 노고를 아끼지 않는 희생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오붓하고 평범한 생활 속에서 있을 수 있는 행복입니다. 그러나 행복하게 보이는 가정도 ‘허구의 집’이라는 것이 드러나기도 하고, 나무토막을 쌓아놓은 것처럼 허물어지는 일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환희이며 기쁨입니다. 어떤 운동 경기도 누구나 어느 정도까지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를 뚫기 위해서는 대단한 노력과 맹렬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한계를 돌파하고 얻는 기쁨, 그것이 환희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이 환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마치 올림픽 금메달은 누구나 딸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넷째는, 우리가 축복이라고도 하고, 복이라고도 하는 행복입니다. 이것은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복을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바라는 행복과 전혀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목적해서 또는 추구함으로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힘으로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과제, 그러니까 사명을 수행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기쁨입니다. 그러고 보면, “무엇이 행복이다” 아니라 “나에게 있어 행복이 무엇이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무엇으로 행복해 하느냐?”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은 이렇습니다. 1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그랬습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그랬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고 그 말씀대로 삽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명이라고 하면 무슨 굉장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마치 아프리카 오지나, 이슬람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아닙니다.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어떤 환경과 처지에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사명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도 그러셨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3절,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다.”라는 겁니다. 6절, “그렇다. 의인의 길은 주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라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이 행복이겠습니까?
성경에서 두 가지 잔치 이야기를 찾아보았습니다. 마가복음 6:21 이하에 보면, 헤롯 왕이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 요인들을 청하여 놓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면 그 잔치자리가 어느 정도인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초청 받은 사람들은 최대한으로 화려하게 차려입었을 겁니다. 음식은 그야말로 산해진미로 산더미 같이 쌓였을 겁니다. 그리고 헤롯 왕은 향기로운 술에 취해서 헤로디아 딸 살로메의 춤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잔치자리는 갑자기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목을 담은 쟁반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왕비 헤로디아가 자신의 부정한 결혼에 대해서 규탄하는 세례자 요한의 목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거기엔, 자기의 행복을 방해하는 사람을 죽여서라도 자기의 행복을 지키려고 했던 왕비 헤로디아의 욕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들어준 헤롯 왕의 교만과 자존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뒤따라 6:30이하에는 또 다른 잔치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겁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오천 명의 사람들이 들판에 오순도순 둘러앉아서 떡을 먹고, 생선을 먹는 모습을…. 거기엔 화려함도 없습니다. 산해진미는커녕 보리떡과 생선만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행복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습니다. 여기엔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하여 남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행복을 위하여 자기 것을 내어놓는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0:35 하반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께서 친히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 하신 말씀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이럴 때에 ‘복이 있다’는 말은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전도서 저자가 말합니다. 전도서 1:2-3,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사람이 세상에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전도서 저자가 별로 재미없는 삶을 살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전도서 저자가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했다 해서 그가 실패한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전도서 저자는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그는 인생을 알고자 끊임없이 공부했고, 인생의 참된 행복을 얻고자 수없이 고민하고 새로운 것에 도전했던 사람입니다. 전도서 1:12-13,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동안에, 하늘 아래에서 되어지는 온갖 일을 살펴서 알아내려고 지혜를 짜며 심혈을 기울였다.” 전도서 2:4-6, “나는 여러 가지 큰일을 성취하였다. 궁전도 지어보고, 여러 곳에 포도원도 만들어 보았다. 나는 정원과 과수원을 만들고, 거기에 온갖 과일나무도 심어 보았다. 나무들이 자라나는 숲에 물을 대려고 여러 곳에 저수지도 만들어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서 저자는 “이 모든 일이 다 헛되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그건 자기가 누리고 싶은 다 누려보았으니 하는 말이지.” 말하자면 배부른 사람의 투정이라는 겁니다. 배가 고파보세요. 그래도 “먹는 것은 다 헛일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지…. 가난해 보세요. 그래도 “돈이라는 건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지…. 그러나 전도서 저자는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고, 아는 것이 많으면 걱정도 많다”고 말합니다. “알고 보니 웃는 것은 ‘미친 것’이고, 즐거움은 ‘쓸 데 없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결국은 죽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나 빌립보서 2:17-18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믿음의 제사와 예배에 나의 피를 붓는 일이 있을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이와 같이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의 제사와 예배에 나의 피를 붓는 일이 있을지라도.” 이 말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지금 빌립보교인들을 위해서 죽더라도 기뻐한답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이해가 됩니까? 여러분은 이것을 기쁨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왜 그렇게 빌립보 교인들을 위하여 죽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을까요?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사람을 위해 무언가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산다고 하는 것은, 서로 사랑하고 사랑 받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기쁨이 있고, 때로는 슬픔과 아픔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그 기쁨도, 그 슬픔도, 그 아픔도 행복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동경합니다. 그래서 사랑을 주제로 한 영화나 소설 등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것뿐입니다. 진짜로는 사랑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분명히 사랑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좋은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습니다. 행동이 없습니다. 노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에릭 프롬’은 그가 쓴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기술이며 사랑하기 위해서는 지식과 노력이 필요하다.” “삶이 기술인 것처럼 사랑은 기술이다.” 그러니까, 사랑은 수동적이 아닙니다. 누군가 나를 사랑하여 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4-7,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여기, 무엇을 하라고 합니다.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사랑은 행동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결코 감정이 아닙니다. “나는 싫어”가 아닙니다. “나는 좋아”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고, 그럼에도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지적이고 의지적입니다. 사랑은 내가 하고자 함으로서 나타나는 행동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고 내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부터 복음을 전했습니다. 수많은 고난을 겪으면서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사실, 바울이 뭐가 부족합니까? 로마의 시민권,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했다는 것 등등을 이야기하면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복음을 전하러 다녔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예, 주님을 사랑한 겁니다. 그리고 이웃을 마치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러 다니는 것이 기쁨이었습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위해 쓰임이 된다고 하는 것이 그에게 행복이었던 겁니다.

 

빌립보서 1:20-24,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아무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온전히 담대해져서, 살든지 죽든지, 전과 같이 지금도,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 보람된 일이면, 내가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은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원합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그렇기에 죽는 것이 더 유익입니다.” 이렇게 말할 때에, 사도 바울의 표정은 어떠했겠습니까? 그 마음의 감동은 어떠했겠습니까? 여러분은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그렇다고 그가 죽을 때가 가까웠다는 것 때문에 슬펐겠습니까? ‘그렇게 고생하고 살다가 이렇게 죽는구나’ 싶어 억울했겠습니까?

 

지금 사도 바울께서는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죽거나 풀려나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1:19, “나는 여러분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우심으로 내가 풀려나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꼭 풀려나야만 은혜가 아니라는 겁니다. 꼭 풀려나야만 복이 아니라는 겁니다. 풀려나지 않아도, 심지어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은혜요 그것이 복이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그것이 유익이랍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 죽어도 유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왜 지금 죽어도 유익하다고 생각합니까? 왜 지금 죽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까? 어떤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까? 그러나 어떤 것이 더 좋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것이 더 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께서 말씀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은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이든 유익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 그것은 당연히 기쁨입니다. 그것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복음을 전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살아있어도 유익입니다. 여전히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죽은 사람들을 살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바울 사도는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을 복이라고 여겼습니다. 그것보다 더 큰 복이 없기에,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심지어 생명조차 내어놓았습니다. 마지못해서가 아닙니다. 억지가 아닙니다. 기뻐서 그리한 겁니다.

 

바울 사도는 감옥살이도 하고, 매도 맞고, 여러 번 죽을 뻔도 하고, 채찍에 맞고, 돌에 맞고, 파선당하기도 하고, 여러 번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그래도 바울은 힘들다 하지 않았습니다. 억울하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는 일은 주님의 일이요, 주님께서 맡기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기뻐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에겐 주님께서 주신 복입니다.

 

사도행전 5장, 사도들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과 그의 지지자들인 사두개파 사람들이 모두 시기심이 가득 차서 들고 일어나,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밤에 주님의 천사가 감옥 문을 열고, 그들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공의회 앞에 끌려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공의회에서도 당당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위협과 죽음 앞에서도 당당히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공의회는 그들을 때렸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놓아주었습니다. 그런데 41-42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공의회에서 물러나왔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그리고 이집 저집에서 쉬지 않고 가르치고 예수가 그리스도인을 전하였다.”

 

그러면 우리는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그것이 무슨 복이냐는 거지요. “아니, 그렇게 복음을 전하다 받은 복이, 그래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는 그런 거냐?”고 되묻겠지요? 예, 그랬습니다. 바울도 그랬고 사도들도 그랬습니다. 그렇게 고난을 당함으로써, 이제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되었다고 기뻐했습니다. 그것을 복이라고 여겼습니다. 분명히 마태복음 5:11에서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살다보니 그렇습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왜 두려워합니까?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예, 죽음입니다. “앞으로 이렇게 되면, 혹은 저렇게 되면 어떻게 하나?”하는 염려. “또 실패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 “이렇게 살다가 크게 아프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 하여간 별의 별 염려가 다 있습니다. 그리고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두려움을 떨치기 위하여 별의 별 일을 다 합니다. 나중을 위해서 곳곳에 쌓아둡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여러분을 지켜줄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쓰고 발버둥을 쳐도 그것들이 우리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한 순간에 쓰러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사명을 가진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사명을 이룰 때까지 쓰러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7장, 바울을 태우고 로마로 가던 배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먹지도 못하고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향해 바울이 말합니다. 22-26절, “그러나 이제 나는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기운을 내십시오. 이 배만 잃을 뿐,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도 목숨을 잃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로 지난밤에, 나의 주님이시오 내가 섬기는 분이신 하나님의 천사가, 내 곁에 서서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는 반드시 황제 앞에 서야 한다. 보아라, 하나님께서는 너와 함께 타고 가는 모든 사람의 안전을 너에게 맡겨주셨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힘을 내십시오.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어떤 섬에 밀려가 닿게 될 것입니다.” 예, 그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풍랑에서 바울을 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함께 가는 모든 사람도 살려주셨습니다. 그들이 탄 배가 풍랑에 깨져버려서 그들 모두 풍랑이 넘실대는 바닷물에 떨어졌는데도, 모두가 살아났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반드시 바울이 로마에 가서 황제 앞에 서야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명을 가지고 그 사명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그런 은혜와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닙니다.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살아가는 삶에서도 복을 주십니다. 요한삼서 2절, “사랑하는 이여, 나는 그대의 영혼이 평안함과 같이, 그대에게 모든 일이 잘 되고, 그대가 건강하기를 빕니다.” 지금 이 편지를 받은 가이오라는 사람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다 된 것 아닙니까? 그런데 편지를 보낸 이는, 그가 모든 일이 잘 되기를 빕니다. 건강하기를 빕니다.

 

마태복음 6:31-33,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모두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려 주실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들에게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이 필요 없다는 말씀인가요? 그런 거 구하면 잘못이라는 건가요? 그래서 직장에도 나가지 말고, 사업도 하지 말고,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건가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구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이방사람이라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구해야 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답니다. 여기, 우리가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얻는 방법, 그것도 풍성하게 얻는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쾌락과 즐거움을 통해 오는 행복, 남녀가 사랑해서 오붓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림으로서 오는 행복, 운동경기나 이런 곳에서 금메달을 따는 행복을 얻기 위해서 노력을 다 합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주어진 과제, 이 사명을 수행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행복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얻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과 모든 것을 투자하면서,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작은 일에서 확고한 행복을 느끼든, 큰일에서 행복을 느끼든, 심지어 고난을 당하면서도 행복을 느끼든,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겁니다. 무엇이, 왜 그 사람에게 행복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며 사십시오. 그러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 같이,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인정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이 있는 사람, 행복한 사람인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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