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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당함으로써 순종을 배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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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주제일교회 작성일 18-07-29 20:03 조회 193 댓글 0
 
첨부 180729 설교.mp3 (23.5M) 18회 다운로드 DATE : 2018-07-30 08:14:28

고난을 당함으로써 순종을 배우라.(히브리서 5:5-10)

 


요한복음 12:20 이하에 보면,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 몇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 벳새다 출신 빌립에게로 가서 예수님 뵙기를 청했습니다. 그래서 빌립은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은 예수님께 그 말을 전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그렇다면 이상합니다. 헬라 곧 그리스 사람이 몇이 찾아와서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는데, 그것이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하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고 하셨는데, 이 영광의 때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지금 일어난 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세 번째 올라가셨을 때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4절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럴 때에,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실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 한 알과 같은 죽음으로써 많은 열매가 거두어질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여서 대제사장이 되는 영광을 차지하신 것이 아니라, 그에게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고 말씀하신 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또 다른 곳에서 ‘너는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임명받은 영원한 제사장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경외하심을 보시어서,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에게서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대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으셨습니다.”

 

우선, 여기 5절의 “이와 같이”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1-4절까지 언급한 옛 언약의 대제사장을 말합니다. 구약에서 각 대제사장은 사람들 가운데서 뽑혀서 임명받습니다.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얻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예수님께 대제사장이 되신 것은, 자신을 스스로 높여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약의 대제사장을 뽑아서 임명하셨듯이, 그렇게 하나님께서 세우신 겁니다.

 

거기에 대한 근거가 시편 2:7입니다. “나 이제 주님께서 내린 칙령을 선포한다. 주님께서 이르시기를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여기, 시편 2:7은 원래 다윗의 가문에서 나오는 왕들에게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메시아에게 적용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에서, 바울은 비시디아의 안디옥에 이르러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았습니다. 늘 그러하듯이 그 날도 율법서와 예언자의 글을 낭독한 뒤에, 회당장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합니다. “형제들이여, 이 사람들에게 권면한 말씀이 있으면 해주시오.” 그래서 바울이 일어나서, 손을 흔들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여, 내 말을 들으십시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오게 하신 것과, 광야 사십 년 동안 그들에 대하여 참아주신 것과, 그리고 끝내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하셔서 나라를 세우게 하신 것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사울을 왕으로 삼으셨고, 그 다음에 사울을 물리치시고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구주를 세워 이스라엘에게 보내셨으니, 그가 곧 예수입니다.” 그리고 32-3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하신 그 약속을 여러분에게 기쁜 소식으로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일으켜서, 조상들의 후손인 우리에게 그 약속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바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한 것과 같습니다.”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이것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일으키심으로 결정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오른편에 높이 올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약속된 다윗 후손이 받을 통치권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시고, 왕위에 앉히심으로써 다윗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통치의 약속을 성취시키셨습니다. 그 약속은 이렇습니다. 사무엘하 7:15-16, “내가 사울에게서 나의 총애를 거두어, 나의 앞에서 물러가게 하였지만, 너의 자손에게서는 총애를 거두지 아니하겠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튼튼하게 서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은혜의 약속은 다윗 개인에게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굴복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과 생명을 일으키도록 작용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예수님의 대제사장 되시는 근거는, 시편 110:4입니다. “주님께서 맹세하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을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다’ 하셨으니, 그 뜻을 바꾸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시편은, 1-3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주님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이것은 성전 예언자일 듯한 사람이, 하나님 곧 여호와께서 자기 주인인 왕을 이 땅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우셨음을 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왕에게 그 위엄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그 왕의 원수들이 왕의 발판이 되기까지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발판은, 굴복한 적의 목을 발로 밟던, 옛 중동의 관습에 근거한 것입니다. 여호수아 10:24, “그들이 이 다섯 왕을 여호수아에게 끌고 오자, 여호수아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그와 함께 전투에 나갔던 지휘관들에게 명령하였다. ‘가까이 와서, 너희 발로 이 왕들의 목을 밟아라.’ 그러자 그들이 가까이 나아가서, 발로 왕들의 목을 밟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시온에서부터 그 왕에게 권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의 손에, 규 그러니까 왕으로서의 권능을 행사할 수 있는 통치 지팡이를 주신 겁니다. 그런데 후기 유대교에서는 이 본문을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에게 관련시켰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2:41-42에서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가 누구의 자손이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3-54절, “그러면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를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말하기를,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된 일이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 그러니까, 시편 110:1-7까지는 ‘다윗의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앞의 ‘여호와’는 분명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뒤의 ‘주’는 누구냐 하는 겁니다. 이 주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있을 수 있으며, 이 주가 누구이기에 원수들을 다스릴 수 있는 권능을 가질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 사람들은 당연히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고 여기고 그렇게 믿은 겁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후손에게서 오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분을 주님이라고 하였으니, 그러니 어떻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34-36에서 성령 충만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키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있어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안은 확실히 알아두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래도 궁금한 것은 또 하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이분께서 어떻게 대제사장이 될 수 있느냐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을 임명하시듯이 예수님을 임명했다고 합시다. 그러나 제사장은 반드시 레위지파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다 지파 사람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그래서 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맹세하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을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다’ 하셨으니, 그 뜻을 바꾸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기 멜기세덱은 창세기 14장에 나옵니다. 소돔이 전쟁을 치르면서 그만 지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잡혀 갔습니다. 그 때에 아브라함의 조카 롯까지 잡아가고, 그의 재산까지도 빼앗아 갔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브라함이 집에서 낳아 훈련시킨 사병 삼백열여덟 명을 데리고 단까지 쫓아갔습니다. 그리고 모든 재물을 되찾고, 그의 조카 롯과 롯을 재산도 되찾으며 부녀자들과 다른 사람들까지 되찾았습니다. 그렇게 되찾아 돌아오는 길에, 살렘 왕 멜기세덱이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천지의 주재, 가장 높으신 하나님, 아브라함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 그리고 아브라함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서 열의 하나를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바로 이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레위 지파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임명하기 훨씬 전에 제사장이었습니다. 멜기세덱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에게서 열의 하나를 받았고, 아브라함을 축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7:3에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그에게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생애의 시작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과 같아서, 언제까지나 제사장으로 계신 분입니다.” 그리고 7:6, “그러나 멜기세덱은 그들의 족보에 들지도 않았지만,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받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대제사장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7:16-17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제사장의 혈통에 대해서 규정한 율법에 따라 제사장이 되신 것이 아니라, 썩지 않는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셨습니다. 그를 두고서 말하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서, 영원히 제사장이다’ 한 증언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대제사장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높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되심은 오히려 낮아지심입니다.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조롱당하시고, 심문당하시고, 미움당하시고, 결국 고난당하시고, 죽임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하심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7-8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경외하심을 보시어서,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제물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제물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4:15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쉽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시고 끝내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셨다고. 그래서 내가 구원을 받았다고. 그런데 그 고난과 그 죽임당하심이 어떤 건지나 아십니까? 그래요.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신 분이 매 좀 맞았다고 아프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신 분이, 그래서 결국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실 분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 뭐가 그리 두렵겠습니까? 그러나 7절에 “예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할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8절에서는,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개역개정성경은 “심한 통곡과 눈물로”라고 하였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하나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보듯이, 될 수만 있으면 그 잔이 지나가기를 원하셨던 겁니다. 여기, ‘잔’이라는 말은 그분이 지셔야 할 십자가 죽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지나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것이 그렇게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니 말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께서 구원하실 사람들을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여전히 죄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너무 불쌍한 겁니다. 구원의 소식이 들려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너무 안타까운 겁니다. 그것은 고통입니다. 그것은 아픔입니다.

 

마가복음 10:45,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정작 죽어야 할 여러분과 저를 살리시려고 대신 죽으셨답니다. 이 땅에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 영원히 불타는 불바다에 던져질 사람을 여전히 사랑하시고 그들 또한 살리시려고 죽으셨답니다. 우리도 그렇게 믿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시고 끝내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셨다고, 그래서 내가 구원을 받았다고, 그렇게 믿습니다. 그러면서 내 생명 또한 주님의 것이라고 여긴 적이 있나요? 우리는 그분을 위하여 통곡한 적이 있나요? 우리는 그분을 위하여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 기도한 적이 있나요? 그리고 그분께서 구원하기 위하여 생명을 주신 저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울어본 적이 있나요? 사랑하는 가족이, 사랑하는 친구가, 사랑하는 이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서 영원히 불타는 불바다에 던져진다는데 아파한 적이 있나요? 그들을 위해 울어본 적이 있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는 아무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이 당하는 고난을 똑같이 겪으셨습니다. 아니, 우리보다 더 큰 아픔을 겪으셨습니다. 빌립보서 2:6-8,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그런 적이 있었나요? 히브리서 12:4, “여러분은 죄와 맞서 싸우지만, 아직 피를 흘리기까지 대항한 일을 없습니다.” 당연히 우리가 피를 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적이 있나요? 우리 피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운 적이 있나요? 오히려 언제나 죄에 넘어가잖아요. 인간의 욕심에 넘어가잖아요. 언제나 하나님의 뜻보다 내 뜻이 먼저잖아요.

 

물론 우리만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께서 복음을 전할 때도 그랬습니다. 디모데후서 4:10-11a,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해서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고.” 분명히 골로새서 4:14에 보면, “사랑하는 의사 누가와 데마도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바울께서 골로새교회에 편지를 쓸 때만 해도 데마는 바울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교회에 데마 이름으로 문안합니다. 그런데 그 데마가 이 세상을 사랑해서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답니다. 예, 이 세상을 사랑하여서…. 주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그리 한 겁니다. 주님의 사랑이 아니라 자기 사랑으로 그리 한 겁니다. 이, ‘자기’ 곧 자아가 우리를 늘 망가뜨리는 겁니다. 이 자아가 우리로 하여금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유기성목사님이 독일 퀼른에서 연합집회를 인도했답니다. 그런데 태권도 사범 교포가 저녁을 대접하겠다고 해서 함께 식사를 했답니다. 식사 도중에 그 교포가 목사님께 감사를 표하면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이번 집회 때 ‘자아를 죽이라’는 말씀에 가장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정말 유익한 말씀이었어요.” 그래서 목사님도 감사했답니다. 자아를 죽이는 것이 결코 이해하기 쉬운 말씀이 아닌데 그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정말 기뻐할 만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답니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으로 덧붙이 한 마디가 목사님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게 뭐지요?” “나는 죽는데, 그 자식들이 안 죽잖아요.”

 

사도 바울께서 빌립보서 4:2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유오디아에게 권면하고, 순두게에게도 권면합니다.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 이럴 때에 유오디게아와 순두게의 이름은 여성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이 두 사람은 빌립보교회의 두 여성 지도자인 겁니다. 그런데 교회에 충성스러운 일꾼인 이 두 사람이 교회 내에 분열을 일으키고 시험을 일으키는 장본인이 된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 이 두 사람에게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한 겁니다. 이들이 왜 그랬겠습니까? 자아가 강해서 그런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그 고난으로 우리의 아픔을 깊이 공감해주셨습니다. 그분은 아무 죄가 없지만,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육체를 십자가에서 찢으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로운 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20에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휘장을 뚫고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휘장은 그의 육체입니다.” 그러니까, 지성소와 성소 사이를 가로막는 휘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오직 대제사장만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언제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4:16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비를 받고 은혜를 입어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셔서 그리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심을 하나님께서 받아주셨습니다. 그리고 9절,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완전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이 말은 예수께서 구원에 이르는 길의 본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 중요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난을 회피하려 하거나 다른 이에게 떠넘기기에 익숙하지 않은가요?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진정한 순종에 이르지 못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 같습니까?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 순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 위에 죽으심으로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대제사장이 되셨고, 대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도 그것을 요구하십니다. 우리 또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그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 순종에 이르셨음을 늘 기억하십시오. 그 길이 결국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기억하십시오.

 

사실, 예수께서 배우는 자로 표시된 것은 신약 성서 전체에서 이곳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순종하시는 분으로서 우리 모두의 본이 되신 겁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의 본보기를 따르며, 그렇게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고난을 통해 순종의 자리에 오르신 예수님을 본받으십시오. 우리 또한 순종하고, 봉사하고, 헌신하고,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신앙이 올바른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본문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그렇기에,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십시오. 그래야 우리 또한 구원을 받는 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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