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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그 백성의 편이 되어 싸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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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주제일교회 작성일 18-07-22 19:39 조회 196 댓글 0
 
첨부 180722 대예배 설교c.mp3 (22.4M) 21회 다운로드 DATE : 2018-07-23 10:39:25

주님께서 그 백성의 편이 되어 싸우신다.(출애굽기 14:19-31)

 


예레미야 32:6 이하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다 왕 시드기야 제 삼 년에, 예루살렘을 바빌로니아 왕의 군대에 의해 포위되어 있었고, 예언자 예레미야는 유다 왕궁의 근위대 뜰 안에 갇혀있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너에게 와서, 아나돗에 있는 그 밭을 너더러 사라고 하면서, 그 밭을 유산으로 살 우선권이 너에게 있기 때문에, 네가 그것을 사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대로,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찾아와서 그 땅을 사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임을 깨닫고 그 땅을 은 열일곱 세겔을 주고 샀습니다. 글쎄요, 은 열일곱 세겔이면 그 당시의 가치는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땅 값이 그야말로 바닥을 친 가격이라고 해도 그 땅을 살 수는 없었습니다. 바빌로니아 왕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라는 곧 망할 것 같은 겁니다. 더구나 예레미야는 근위대 뜰 안에 갇혀있어서 언제 풀려날 지도 모릅니다. 언제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그런 상황에서 땅을 사겠습니까?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 밭을 삽니다. 이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에는 분명 황당한 일입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아주 현실감이 둔한 사람입니다. 세상에 이런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사람들은 또 뭐라고 하겠습니까? 예레미야는 이제 유다가 바빌로니아 왕의 손에 넘어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유다 왕 시드기야가 바빌로니아로 끌려간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예레미야는 땅을 사는 겁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사람들로부터 비난의 소리를 듣게 될 겁니다. 값싸게 땅을 사려고 거짓 예언을 한 거라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 땅을 샀습니다. 그것은 8절 하반절, “그 때에 나는 이것이 바로 주님의 명령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셨고 예레미야는 그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궁금한 것은 궁금한 겁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그 중에 25절, “주 하나님,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이 도성이 이미 바빌로니아 군대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저더러 돈을 주고 밭을 사며, 증인들을 세우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36-38절, “이제 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너희는 이 도성을 두고, 전쟁과 기근과 염병을 만나서 바빌로니아 왕의 손에 들어간 도성이라고 말하지만, 똑똑히 들어라. 내가 분노와 노여움과 울화 때문에 그들을 여러 나라로 내쫓아 버렸다. 그러나 이제 내가 그들을 이 모든 나라에서 모아다가, 이 곳으로 데려와서 안전하게 살게 하겠다. 그러면 그들이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한결 같은 마음과 삶을 주어, 그들이 언제나 나를 경외하여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손들까지도 같이 복을 받게 하겠다. 그 때에는 내가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고, 내가 그들에게서 영영 떠나지 않고, 그들을 잘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마음속에 나를 경외하는 마음을 넣어 주어서, 그들이 나에게서 떠나가지 않게 하겠다. 나는 그들을 잘되게 함으로 기뻐할 것이며, 나의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뿌리를 굳게 내리고 살게 하겠다.” 그러면 결국은 사람들이 이 땅으로 돌아와서 밭을 살 거라 하십니다. 44절, “앞으로 베냐민 땅에서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사방과 유다 성읍들과 산간지역의 성읍들과 평지의 성읍들과 남쪽의 성읍들에서도, 사람들이 돈을 주고 밭을 사서 매매계약서를 쓰고, 봉인하고, 증인들을 세울 것이다. 포로로 잡혀 간 사람들을, 내가 돌아오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 주의 말이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스라엘의 회복입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서, 하나님께서 그 땅을 멸망의 길로 인도하시지만, 그러나 그 나라를 영원히 멸망시키지는 않으십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회복시키시고, 그 땅에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그 땅을 사라고 하셨습니다. 예언자는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또 하나, 우리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집니다. 오늘의 고난이 고난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의 슬픔이 슬픔으로 끝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다 좋은 것으로 회복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두렵습니다. 언제나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대로 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룻기 1장에서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은 아내 나오미와 아들 둘을 데리고 모압으로 떠났습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엘리멜렉은 죽고 나오미와 두 아들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두 아들은 결혼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한 십 년쯤 살았습니다. 그런데 두 아들마저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그 땅으로 가서 그렇게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남편과 두 아들을 잃어버린 나오미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삶이 우리의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두렵습니다.

 

어떤 사람은 엘리멜렉이라는 이 가족이 약속의 땅인 베들레헴을 버리고 이방 사람의 땅인 모압으로 갔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말합니다. 두 아들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 여자, 곧 모압 여자와 결혼을 했기 때문에 두 아들을 잃어버린 거라고도 말합니다. 그러면 모압 사람인 룻이 보아스를 만난 거나, 그래서 아들 오벳을 낳았는데, 그 아들 오벳이 다윗의 할아버지인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약속의 땅 고향으로 돌아왔기에 받은 복이라고 하겠습니까? 며느리 룻이 시어머니를 잘 섬겼기에 이런 복을 받았다고 말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요 경륜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요,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되어가는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요 은혜입니다. 누가 멸망당한 이스라엘이 당시 세계 강대국인 바빌로니아에서 해방되리라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누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어버린 이 불행한 여자가, 다윗이라고 하는 유명한 왕의 증조할머니가 된다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예,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이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 없을 정도로 죄가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셔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죄를 두고 볼 수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하나님의 외아들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분께서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세상에! 이거 우리가 어찌 알았겠습니까?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 상상도 못할 구원의 완성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4,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 된 것은 하나도 없다. 창조된 것은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창조된 것은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다.” 그러니까, 세상을 만드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세상 안의 모든 것들이 생명을 얻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보십시오. 창세기 32장의 야곱은 이미 가질 만큼 가졌습니다. 재산이나 아들이나 넉넉하게 가졌습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야말로 금의환향입니다. 빈손 들고 나왔다가 엄청난 부자가 되어서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두려운 마음이 여전히 있었습니다. 형님을 만나야 한다는 겁니다. 이건 세월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건 그가 가진 재산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야곱 자신이 그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데, 그 형인 에서가 잊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얍복강 앞에서, 그가 가진 모든 것, 식구들과 재산을 먼저 강 건너로 보냅니다. 그리고 달랑 혼자 남았습니다. 그렇게 홀로 남았는데, 어떤 이가 나타나 야곱을 붙잡고 동이 틀 때까지 씨름을 하였습니다. 그 어떤 사람은 도저히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와 씨름을 하다가 엉덩이뼈를 다쳤습니다. 날이 세려고 하자 그 어떤 이는 야곱에게 놓아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기에 축복해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떼를 씁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말씀드렸듯이 야곱을 가질 만큼 가졌습니다. 그야말로 복을 받을 만큼 받은 겁니다. 그런데 왜 축복하고 가라고 떼를 썼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돌아다보면, 온통 자기가 애써서 일군 것들입니다.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형을 속였습니다. 심지어 외삼촌도 속였습니다. 그의 양떼가 늘어난 것도 미루나무와 감복숭아나무와 플라타나스 나무에서 푸른 가지들을 꺾어서 껍질을 벗긴 다음에, 벗긴 가지에 흰 무늬를 냈습니다. 그래서 얼룩지고 점이 박혀 있는 양들에 태어나게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양떼를 늘여갔습니다. 이제 형을 만나러 가는 순간에도 먼저 심부름꾼을 에서에게 선물과 함께 보냈습니다. 만약을 대비해서, 재산과 식구들을 네 떼로 나누어서 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두려웠습니다. 더구나 앞서 갔던 심부름꾼들이 돌아와서 형 에서가 사백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오고 있다고 전해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야곱이 아무리 기발한 생각으로 그렇게 해서 재산을 모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를 편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런저런 방법을 다 쓴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두려웠습니다.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래서 가질만큼 가졌습니다. 그러나 두렵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있어야 두려움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나오던 때입니다. 참으로 지긋지긋한 이집트 생활이었습니다. 물론 처음 요셉으로 인해 이집트로 들어갔을 때에는 좋았습니다. 그들이 이집트 사람들과 떨어져서 풀이 많은 곳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완전히 이집트의 노예로 살아야 했습니다. 심지어 바로의 명령에 따라 아들을 낳으면 죽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건져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렇게 인도함을 따르다보니, 홍해 앞에 선 겁니다. 앞에는 홍해, 그리고 뒤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다고 여긴 바로의 말과 병거들과 병사들이 달려오고 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크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그들에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가만히 서서, 주님께서 오늘 당신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지켜보기만 하십시오. 당신들이 오늘 보는 이 이집트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을 구하여 주시려고 싸우실 것이니, 당신들은 진정하십시오.”

 

그러나 그 구원의 역사는, 모세로 하여금 단지 지팡이를 들고 팔을 홍해 앞으로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15-16절, “너는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여라. 너는 지팡이를 들고 바다 위로 너의 팔을 내밀어, 바다가 갈라지게 하여라. 그러면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으며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말씀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우선,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홍해바다 쪽으로 더 가까이 가라는 겁니다. 그야말로 막다른 골목으로 아예 몰아넣으라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백성들 보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지팡이를 들고 바다를 향해 내밀라고 하셨습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해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바다가 갈라지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겁니다. 그러나 어떻든 모세는 백성들을 바닷가까지 나아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바다를 향해 지팡이를 든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바다가 갈라졌습니다. 그리고 바닥이 드러났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한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으며 지나갔습니다. 물이 좌우에서 그들을 가리는 벽이 되었습니다.

 

뒤이어 이집트 바로의 말과 병거와 기병이 모두 이스라엘 백성의 뒤를 쫓아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왔습니다.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지런히 걸었지만, 이집트의 병거와 병사들의 걸음을 이길 수 없는 겁니다. 새벽녘이 되어, 하나님께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에서 이집트 진을 내려다보시고, 이집트 진을 혼란 속에 빠뜨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병거의 바퀴를 벗기셔서 전진하게 어렵게 만드시니, 이집트 사람들이 외쳤습니다. “이스라엘 앞에서 우리가 도망하자 여호와가 그들을 위하여 싸워 애굽 사람들을 치는도다.” 새번역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쫓지 말고 되돌아가자. 그들의 주가 그들 편이 되어 우리 이집트 사람과 싸운다.”

 

하나님께서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바다 위로 너의 팔을 내밀어라. 그러면 바닷물이 이집트 사람과 그 병거와 기병 쪽으로 다시 흐를 것이다.” 그래서 모세가 다시 바다 위로 팔을 내미니, 새벽녘에 바닷물이 본래의 상태로 돌아왔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되돌아오는 물결에서 벗어나려고 하였으나, 주님께서 이집트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빠뜨리셨습니다. 이렇게 물이 다시 돌아와서 병거와 기병을 뒤덮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뒤를 따라 바다로 들어간 바로의 군대는 하나도 남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궁금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게 살리시고, 이집트 병사들은 그렇게 죽이실 까닭이 있을까?’ 하는 겁니다. 요즘 인권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하잖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하십니다. 30-31절, “바로 그 날,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구원하셨고, 이스라엘은 바닷가에 널려 있는 이집트 사람들의 주검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치신 주님의 크신 권능을 보고 주님을 두려워하고, 주님과 주님의 종 모세를 믿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의 바로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셨습니다. 끝내 그가 그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자, 장자들까지 죽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집트의 바로는 끝내 자기의 고집을 꺾지 않고, 군대를 동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잡아들이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병사들이 죽은 겁니다.

 

이건, 이집트뿐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러셨습니다. 그들이 광야 사십 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평할 때마다 그들은 그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서 나라를 이루고 살 때에도,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할 때에, 그들을 그 땅에 쫓아내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서, 아무렇게 해도 된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나 이방 사람이나 똑같이 여기셨습니다. 다만, 그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4:17-19,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심판이 우리에게서 먼저 시작되면, 하나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의 마지막이 어떠하겠습니까? 의인도 겨우 구원을 받는다면, 경건하지 않은 자와 죄인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난을 받는 사람은, 선한 일을 하면서 자기 영혼을 신실하신 조물주께 맡기십시오.” 이럴 때에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여기 영혼이라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영원히 죽지 않는 그런 영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기 영혼이라는 말은 우리의 생명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생명을 신실하신 조물 곧 하나님께 맡기라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 먼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예수 믿는다고 하는 우리에게서 먼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요한복음 3:17-18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전히 우리랑 같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처음 오신 목적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것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모든 죄를 용서하시려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겁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은 심판하러 오십니다.

 

요한계시록 20:11-12, “나는 크고 흰 보좌와 거기에 앉으신 분을 보았습니다.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사라지고, 그 자리마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나는 또 죽은 사람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할 것 없이 다 그 보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13절, “바다가 그 속에 죽은 사람들을 내놓고, 사망과 지옥도 그 속에 있는 죽은 사람들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들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그 행위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행위가 거룩해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용서함을 받은 겁니다. 그래서 행위대로 심판을 받을 때에죄 용서함을 받은, 그 행위를 용서받은 사람들은 살아납니다. 죄를 용서받았기에, 그들의 행위는 용서함을 받았던 겁니다. 그러나 그들의 죄가 용서받지 못한 사람, 여전히 그 행위가 악한 채로 남아있는 사람들은 결국 둘째 사망인 불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에게 가장 두려운 것이 죽는 겁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둘째 사망입니다. 영원히 불타는 불바다에 던져지는 겁니다. 히브리서 9:27,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일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 심판에서 오히려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죽음에 대해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만히 있는데도 하나님의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문제는 누구나 다 그렇게 쓰임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 중에 장정만 육십 만 명이 넘습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 쓰임 받았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만이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 사람이 모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세를 압니다. 이집트의 왕궁에서 사십 년을 보냈습니다. 이집트 사람을 죽여서 도망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에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빠져나려던 사람입니다. 도무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가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로 했을 땐 상황이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붙드시고, 강하게 쓰셨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입니까? 모세가 우리와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예, 모세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가만히 서서, 주님께서 오늘 당신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지켜보기만 하십시오. 당신들이 오늘 보는 이 이집트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을 구하여 주시려고 싸우실 것이니, 당신들은 진정하십시오.” 여기, 모세는 무어라고 말합니까? “주님께서 당신들을 구하여 주시려고 싸우실 것이니” 그래서 그들을 뒤쫓던 이집트 병사들이 무어라고 말합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을 쫒지 말고 되돌아가자. 그들의 주가 그들 편이 되어 우리 이집트 사람과 싸운다.” 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의 편이 되셔서, 우리를 위하여 싸우십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건 여러분도 믿으시잖아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도 믿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셔서 싸우심’을 믿어야 합니다.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렇기에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세력을 가진 바로가 두려운 게 아닙니다. 앞을 가로막는 홍해가 두려운 것도 아닙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이집트의 병거와 병사가 두려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편이 되셔서 우리로 하여금 이기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어떤 문제보다 크십니다. 하나님께서 해결하지 못할 일은 세상에 없습니다. 이제 바로를 이기게 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 또한 이기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제 홍해를 가르셔서 그 백성들이 안전하게 건너게 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앞을 가로막는 그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실 것을 믿습니다. 아무리 악한 자들이 덤벼들어도 능히 이기게 하심도 믿습니다. 그렇기에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내 편이십니다.

 

우리 이렇게 외쳐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내 편이 되어 싸우신다.”
“주님께서 내 편이 되어 싸우신다.”
“주님께서 내 편이 되어 싸우신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또한 주님 편이 되어 싸우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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