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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살 길로 들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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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주제일교회 작성일 18-07-08 21:42 조회 172 댓글 0
 
첨부 20180708 오전설교c.mp3 (24.2M) 16회 다운로드 DATE : 2018-07-09 21:08:02

새로운 살 길로 들어갑시다.(히브리서 10:19-25)

 


히브리서 9:19-21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모세가 율법을 따라 모든 백성에게 말한 뒤에,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와 함께 송아지 피와 염소 피를 취하여 언약책과 온 백성에게 뿌리고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입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또 같은 방식으로 그는 장막과 제사 의식에 쓰이는 모든 기구도 피를 뿌렸습니다.” 여기, 장막의 첫째 칸은 성소라고 하는데, 제사장들이 언제나 들어가서 제사의식을 집행합니다. 둘째 칸은 지성소라고 하는데, 대제사장만 일 년에 한 번 들어갑니다. 이럴 때에 대제사장은 자기를 위해, 그리고 백성이 모르고 지은 죄를 사하기 위하여, 바칠 피를 가지고 들어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형이고 그림자입니다. 히브리서 8:5, “그러나 그들은 하늘에 있는 모형과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땅에 있는 성전에서 섬깁니다. 모세가 장막을 세우려고 할 때에, ‘너는 명심하여 내가 산에서 보여준 그 모형을 따라 모든 것을 만들어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피 흘림입니다. 피 흘림으로 죄인들이 그 죄를 용서받습니다. 피 흘림으로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된 것이 거룩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첫 번째 언약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첫 번째 언약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 언약도 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예,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상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첫 번째 언약을 주시면, 그것이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왜 두 번째 언약을 주셨습니까?

 

히브리서 8:7, “그 첫 번째 언약에 결함이 없었더라면, 두 번째 언약이 생길 여지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언약에 결함이 생겼다는 겁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첫 번째 언약 자체가 결함이 있다는 거 아닙니다. 첫째도 둘째도 다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입니다. 문제는 그 언약이 사람들을 완전하게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제사 행위를 늘 반복해야 한다는 겁니다.

 

히브리서 8:8-12,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날이 이를 것이다. 그 때에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을 것이다. 이 새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 조상들과 맺은 언약과 같은 것이다. 그들은 내 언약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나도 그들을 돌보지 않았다. 그 날 뒤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나는 내 율법을 그들의 생각에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다가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각각 자기 이웃과 자기 동족을 가르치려고, 주님을 알라고 말하는 일이 없을 것이니, 작은 사람으로부터 큰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불의함을 긍휼히 여기겠고, 더 이상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1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첫 번째 언약을 낡은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낡고 오래된 것은 곧 사라집니다.”

 

사실, 구약의 언약은 사람들이 지키려면 얼마든지 지킬 수 있습니다. 물론 죄를 짓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은 죄를 용서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면 됩니다. 이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에는 이 말씀대로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별 것도 아닌 걸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제물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감이 소홀해졌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마음도 사라졌습니다. 그냥 습관에 따라 형식적으로 짐승을 들고 성막으로 갔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망쳤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제물드림이 아무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언약은 이제 쓸모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첫 번째 언약이, 너무 오래 되어서 낡았기 때문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첫 번째 언약을 낡은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낡고 오래된 것은 곧 사라집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어쩌다 이단들은 자기들의 교리가 최신형이라고 우깁니다. 천주교에서 개신교가 나왔고, 개신교에서 자기들이 나왔다고 우깁니다. 마치 시간이 지나면서 옛 것은 낡았기에 새로운 것이 생겨났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아닙니다. 첫 번째 언약이 오래 되고 낡아서 새 언약을 주신 거 아닙니다. 옛 언약이 구원에 대한 모형이요 그림자라면, 새 언약은 구원의 완성이며 구원 자체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19-2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휘장을 뚫고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휘장은 곧 그의 몸입니다.”

 

이렇습니다. 그 옛 언약에서는 아무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일 년에 하루만 대제사장이 그곳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자 성서와 지성소를 가르고 있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마태복음 27:50-51a, “예수께서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숨을 거두셨다. 그런데 보아라,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단지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피 흘림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로 지성소 안, 그러니까 하나님 앞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이고, 동시에, 이제 내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는 겁니다. 구원은, 죄를 용서받는 겁니다. 구원은, 의롭다고 여김 받는 겁니다. 그리고 구원은, 죄 용서받는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야기하고,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죄를 지을 때마다 짐승 한 마리를 끌고 오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때로는 죄를 짓는 것에 대해 전혀 부담이 없는 겁니다. 죄 지으면 짐승 한 마리 끌고 오면 되니까요. 어쩌면 오늘 우리도 그런 거 아닌가 싶습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회개하면 용서하신다고 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누가복음 17:3-4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믿음의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 주어라. 그가 네게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서 ‘회개하오’ 하면, 너는 용서해 주어야 한다.” 마태복음 18:22에서는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럴 때에,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만 그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리 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리가 지은 죄는 언제든지 용서 받을 수 있는 겁니다. 마치 공중그네를 타는 사람들 밑에 쳐놓은 그물과 같은 겁니다. 그들은 실수로 떨어져도 그물 위에 떨어져서 안전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죄를 지어도 결코 사망에 이르지 않도록 회개의 은혜를 주신 겁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공중 그네를 타는 사람들이 아무렇게 해서 마구 떨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공중 그네의 묘기를 보여주려고 그 위에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언제든지 회개하면 용서하신다고 해서, 우리 역시 얼마든지 죄를 지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은 흠이 없는 거룩한 사람입니다.

 

앞서 히브리서 10:9b-10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첫 번째 것을 폐하셨습니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써 우리는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습니다. 대제사장은 해마다 짐승의 피를 가지고 성소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것은, 또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자기 생명을 제물로 내어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히브리서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셨고, 두 번째로는 죄와는 상관이 없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첫 번째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에 죄 용서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두 번째 오시는 예수님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죄 용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기에 이제 우리는 두 번째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두 번째로 오실 때에는, 죄와는 상관이 없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써 우리는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에 거룩하다는 것은,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아무 흠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럴 때에 거룩하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광야에 가셔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 바닷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셨습니다. 그 때부터 예수님께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럴 때에 ‘하늘나라’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그렇기에 회개는, 그렇게 함으로써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다스림에 머무는 것의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회개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다. 회개는, 죄를 지을 때마다 하는 한 순간의 고백이 아닙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 안에서 사는 겁니다.

 

누가복음 3:10,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으라”고 외친 세례자 요한의 말씀에 무리들이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렇다면 이 물음이 타당합니까? 회개하고 죄 용서함 받으면 되는 데,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을 까닭이 있느냐는 겁니다. 예, 있습니다. 회개하고 죄 용서함을 받은 사람은, 그렇게 죄 용서함을 받은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요한이 무리에게 말합니다. “속옷이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세리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 군인들에게 말합니다. “아무에게도 협박하여 억지로 빼앗거나, 거짓 고소를 하여 빼앗거나, 속여서 빼앗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하게 하여라.” 무슨 말입니까? 회개하고 죄 용서를 받았으면, 그 삶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구원하셨습니까? 에베소서 2:10,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작품으로 만드셨습니까? 예, ‘선한 일을 하게 하려고’ 만드셨습니다. 여기 ‘선한 일’은, 우리가 말하는 착한 일이 아닙니다. 여기 ‘선한 일’은,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도록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만드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제물로 죽으신 것은 죄를 용서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 안에서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누가복음 17:11 이하에 열 명의 나병환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만나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홉 명은 안 돌아오고, 한 명만 와서 예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여러분 생각에, 아홉 명은 왜 돌아와서 감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아홉 명의 나병환자 중 하나라면 왜 안 돌아왔을 것 같습니까? 복잡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율법대로 했기 때문입니다. 나병에서 나으면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일정한 제물을 드리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면 된 거 아닙니까? 그런데 굳이 예수님을 찾아가서 감사하고 뭐하고 그럴 까닭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지 않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그렇습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회개합니다. 그리고 죄 용서를 받으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하라고 하신대로 했으니까요. 그러면 물어보겠습니다. 왜 그들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려야 합니까? 죄 용서함을 받기 위해서. 그러면 다른 신들에게 드리면 안 됩니까? 왜 하나님께만 드려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만이 그들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죄사함에는 관심이 많은 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희생제물만 있었지,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은 없습니다.

 

그래서 아모스 5:21-25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예레미야 7:21-23,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받고 싶은 것은 제사가 아니다. 너희가 번제는 다 태워 내게 바치고 다른 제물은 너희가 먹는다고 하지만, 내가 허락할 터이니, 번제는 무슨 제사든 고기는 다 너희들이나 먹어라. 내가 너희 조상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번제물이나 다른 어떤 희생제물을 바치라고 했더냐? 바치라고 명령이나 했더냐? 오직 내가 명한 것은 나에게 순종하라는 것, 그러면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러면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것, 내가 그들에게 명하는 그 길로만 걸어가면, 그들이 잘 될 것이라고 한 것뿐이지 않느냐?”

 

이사야 1:11-12,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 그리고 16-17절, “너희는 씻어라. 스스로 성결하게 하여라. 내가 보는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버려라. 악한 일을 그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

 

그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물을 드려 죄 용서함 받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하는 그 길로만 순종하며 걸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성결하게 하고, 하나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우리의 악한 행실을 버리는 것입니다. 악한 일을 그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우고, 정의를 찾고,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러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잘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그래서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겁니다.

 

오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그것입니다. 분명히 죄 용서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지 못합니다. 사랑을 받았다고 말하면서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서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3:10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가 여기에서 환히 드러납니다. 곧 의를 행하지 않는 사람과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제물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마다 죄 용서함 받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죄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거룩함을 허락하셨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졌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거룩한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곧 성령으로 사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은, 우리가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거룩한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룩한 삶, 곧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룩한 사람을 살다가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용서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다가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용서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2-2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우리는 마음에다 예수의 피를 뿌려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맑은 물로 몸을 깨끗이 씻었습니다. 또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니,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 소망을 굳게 지킵시다. 그리고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합시다.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는 모이기를 그만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

 

늘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여전히 죄 가운데 삽니다. 악을 행하며 삽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을까요? 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셨을까요? 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그러셨습니다. 그래서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죄 용서함 받았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렇게 새 길을 열어주신 그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고린도전서 10:12에서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6:10-13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그분의 힘찬 능력으로 굳세게 되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온몸을 덮는 갑옷을 입으십시오. 우리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그래야만 여러분이 악한 날에 이 적대자들을 대항 할 수 있으며 모든 일을 끝낸 뒤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여전히 우리의 자아로 산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의 고백과 같이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 못합니다.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우리를 우리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 내가 기뻐하는 것을 추구합니다. 더구나 악한 영, 곧 악마는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5:8-9에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 악마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악마와 맞서 싸우십시오. 여러분도 아는 대로, 세상에 있는 형제자매들도 다 같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에 굳게 서야 합니다. 악마와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열어주신 새 길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는,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는 겁니다. 또 하나는, 언제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심판의 날은 우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아예 히브리서 10:26-29에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우리가 진리에 대한 지식을 얻은 후에도 짐짓 죄를 짓고 있으면, 속죄의 제사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남아 있다고 예상할 수 있는 것은 무서운 심판과 반역자들을 삼킬 맹렬한 불뿐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어긴 사람도 두세 증인의 증언이 있으면 가차 없이 사형을 받는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해 준 언약의 피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모독한 사람은, 얼마나 무서운 형벌을 받아야 하겠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에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뿌려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깨끗해야 합니다.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 소망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무엇보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하는 일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는 모이기를 그만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예배에 참석하도록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25b, “그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 예, 주님의 날이 가까워 오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날이 가까워 오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 길로 들어가십시오. 그 길이 곧 우리의 구원의 길이요 생명의 길인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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