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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사랑을 회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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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주제일교회 작성일 18-07-01 15:41 조회 224 댓글 0
 
첨부 180701오전예배설교a.mp3 (24.8M) 26회 다운로드 DATE : 2018-07-01 19:03:07

처음 사랑을 회복하십시오.(요한계시록 2:1-7)

 


어느 시골 교회, 뒤쪽의 둥근 시계가 걸렸답니다. 하루에 한 번도 안 맞는답니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하루에 한 번은 맞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 시계를 떼어낼 수 없대요. 그 교회 장로님이 장로취임 때 기념으로 해놓으신 거랍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불평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 장로님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나요? 늘 그 시계를 바라볼 때마다 처음 장로취임 때를 기억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때의 감격과 다짐을 다시 생각해내고, 그리고 그 때의 마음으로, 아니 그 때의 마음보다 더 열정적으로 신앙생활 하고자 하는 그런 마음이라면, 그 시계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그 장로님에 있어, ‘기념비’가 되는 것이지요.

 

출애굽기 23:14-17에는 세 가지 큰 절기에 관한 법을 말씀합니다.
“너희는 한 해에 세 차례 나의 절기를 지켜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명한 대로, 아빕 월의 정해진 때에, 이레 동안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어야 한다. 너희가 그 때에 이집트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너희는 빈 손으로 내 앞에 나와서는 안 된다. 너희는 애써서 밭에 씨를 뿌려서 거둔 곡식의 첫 열매로 맥추절을 지켜야 한다. 또한 너희는 밭에서 애써 가꾼 것을 거두어들이는 한 해의 끝 무렵에 수장절을 지켜야 한다. 너희 가운데 남자들은 모두 한 해에 세 번 주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한다.” 이럴 때에 아빕 월 정해진 때에 드리는 절기는 이미 경험된 절기입니다. 그것은 이집트에서 있을 때에, 마지막 재앙이었던 장자의 죽음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아났던 유월절입니다. 그리고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으므로 무교절입니다. 그러나 밭에서 거두어들인 첫 열매로 맥추절을 지킨다는 것과, 한 해의 끝 무렵에 거두어들인 것으로 수장절을 지킨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광야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겁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사십 년 뒤, 그들은 가나안 땅 가까이 이를 때까지,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농사를 짓지도 않는 상황에서 첫 열매를 드리는 맥추절은 무엇이며, 한 해의 끝 무렵에 거두어들인 것으로 드리는 수장절을 무엇이겠습니까? 농사를 지어야 이 절기를 지킬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은 약속입니다. 언젠가 농사를 짓게 되리라는 약속입니다. 그렇게 농사를 짓게 되면, 그렇게 절기를 지키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농사를 짓게 되면, 이 말씀을 기억하고 절기를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광야에서 주셨던 만나를 기억하라는 겁니다. 비록 이제 내 손으로 농사를 짓고, 먹거리를 내 손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하더라도,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주셨던 만나를 기억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거두어들인 모든 먹거리 역시 하나님께서 주심을 인정하라는 겁니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말씀의 성취는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면 말씀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많은 기적을 보여주시고,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3:19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하여금 ‘내가 곧 나’임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14:29, “지금 나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태복음 24장이나 마가복음 13장에서 말씀하신 예루살렘 성전 파괴나, 재난의 시작과 예수님의 다시 오심 등의 모든 말씀은 당장에 있을 일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앞으로 있을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미리 하신 것은, 정작 그런 일이 일어날 때에,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아하! 그 때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하신 말씀이구나!” 그렇게 해서, 예수님께서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됩니다. 그것도 아주 확실하게 믿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 날에 대해 대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여기서 살아가는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그 하신 모든 말씀이 반드시 그대로 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대로 믿음을 가지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기억할 것이 있어야 합니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때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기억할 만한 사건이 있어야 합니다.

 

사무엘상 7:5, 사무엘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두 미스바에 모이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모여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주님께 기도를 드리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미스바에 모여서 물을 길러다가, 그것을 제물로 삶아 주님 앞에 쏟아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가 주님을 거역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미스바는, 사무엘이 이스라엘 자손 사이의 다툼을 중재하던 곳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는 소식이 블레셋 사람에게 들어가니, 블레셋 통치자들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올라왔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그 소식을 듣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이 사무엘에게 가서 이렇게 간청했습니다. “주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 주시도록, 쉬지 말고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을 한 마리 가져다가 주님께 온전한 번제물로 바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달라고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사무엘이 번제를 드리고 있을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주님께서 큰 천둥소리를 일으켜 블레셋 사람을 당황하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패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미스바에서 나와서, 블레셋 사람들을 벳갈 아래까지 뒤쫓으며 무찔렀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돌 하나를 가져다가 미스바와 센 사이에 놓고, “우리가 여기에 이르기까지 주님께서 도와 주셨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돌의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지었습니다. 이럴 때에 ‘에벤에셀’이라는 말은, ‘도움의 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겁니다.

 

그 이전, 여호수아 3장에서,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넙니다. 이 요단강을 건너면, 본격적인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입니다. 그런데 이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이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하신 대로,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백성에서 나아갔습니다. 그 궤를 멘 사람들이 요단강까지 왔을 때에는, 마침 추수기간이어서 제방까지 물이 가득 차올랐습니다. 그러나 그 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강에 들어섰습니다. 그렇게 그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 물가에 닿았을 때에, 위에서부터 흐르던 물이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흘러가는 물줄기가 완전히 끊겼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여리고 맞은쪽으로 걸어서 건너갈 수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4:1-3, 온 백성이 모두 요단강을 건넜을 때에,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백성 가운데서 각 지파마다 한 사람씩 열두 사람을 뽑아서 세워라. 그리고 그들에게,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그곳 요단강 가운데서 돌 열두 개를 가져다가, 오늘 밤 그들이 머무를 곳에 두라고 하여라.” 그래서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명령했고, 백성들은 그 말씀대로 이스라엘의 지파 수에 따라 요단강 가운데서 돌 열두 개를 메고나와 그들이 머무르려는 곳까지 가져다 놓았습니다. 이제 궤를 맨 제사장들이 강에서 올라왔습니다. 그러자 요단강 물은 다시 원래대로 흘러 전과 같이 강둑에 넘쳤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여리고 동쪽 길갈에 진을 쳤는데, 여호수아는 요단강에서 가져온 돌 열두 개를 길갈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21-24절, “당신 자손이 훗날 그 아버지들에게 이 돌들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거든, 당신들은 자손에게 이렇게 일러 주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이 요단강을 마른 땅으로 건넜다. 우리가 홍해를 다 건널 때까지, 주 우리 하나님이 우리 앞에서 그것을 마르게 하신 것과 같이, 우리가 요단강을 다 건널 때까지, 주 우리의 하나님이 요단강 물을 마르게 하셨다. 그렇게 하신 것은, 땅의 모든 백성이 주님의 능력이 얼마나 강하신가를 알도록 하고, 우리가 영원토록 주 우리의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기념비는 단지 기억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 옛날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을 기억하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도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고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 자손들이 그 아버지들에게 이 돌들의 뜻이 무엇인지를 물으면 일러주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 요단강을 마른 땅으로 건넜다. 우리가 홍해를 다 건널 때까지, 주 우리 하나님이 우리 앞에서 그것을 마르게 하신 것과 같이, 우리가 요단강을 다 건널 때까지, 주 우리의 하나님이 요단강 물을 마르게 하셨다. 그렇게 하신 것은, 땅의 모든 백성이 주님의 능력이 얼마나 강하신가를 알도록 하고, 우리가 영원토록 주 우리의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자녀 손들에게 들려주는 겁니다. 그래서 그 후손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 가운데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녀들이 우리에게 물을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무슨 돌이냐?”고 물을 것이 있어야 합니다. 물을 것이 없으면 묻지도 않을 것이고, 묻지 않으면 말해 줄 것도 없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에베소 교회는 그랬습니다. 그들이 한 일과, 수고와 인내는 주님께서도 알아주셨습니다. 그들이 악한 자들과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것과,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지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거짓말쟁이임을 밝혀 낸 것도 주님께서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참고, 고난을 견디어 냈습니다. 이것은 크게 칭찬 받을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나무랄 게 있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그들이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앞서 칭찬하신 그 모든 칭찬과 비교해서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 더 큰 문제냐 싶은 생각이 들 겁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앞서 칭찬하신 내용과 처음 사랑을 비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 칭찬은 칭찬입니다. 그러나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은 문제입니다. 사실 사랑을 잃어버리면, 앞서 일했던 것들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그들의 수고와 인내, 악한 자들을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것과 거짓 사도를 밝혀낸 것,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참고 견디었던 그 모든 일에, 사랑이 없다면 무슨 의미겠습니까?

 

그렇다면 처음 사랑은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20장, 십계명이 있습니다. 그 시작은 이렇습니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 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주 하나님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처음 사랑이었습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계명을 지켜야 합니까? 예, 그들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이끌어내신 분이 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이끌어내신 주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랬습니다. 출애굽기 14장, 그들이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러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은 그들의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출애굽기 15:1b-3, “내가 주님을 찬송하련다. 나의 노래, 나의 구원, 주님이 나의 하나님이니, 내가 그를 찬송하고, 주님이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련다. 주님은 용사이시니, 그 이름 주님이시다.” 13절, “주님께서 한결같은 사랑으로, 손수 구원하신 이 백성을 이끌어 주시고, 주님의 힘으로 그들을 주님의 거룩한 처소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그들이 경험한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하나님의 기적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사랑을 버렸습니다. 그랬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그랬습니다. 그들은 잘 했지만, 그 처음 사랑을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은 처음 사랑을 기억하는 겁니다. 만약 기억할 것이 없다면, 혹은 있었는데 잊어버렸다면, 새롭게 그 사랑을 경험을 해서 기억할 것을 만들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8:7,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무덤을 찾아온 여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전하기를,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 나셔서,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 그들은 거기서 그를 뵙게 될 것이라고 하여라.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이다.” 그런데 신기하지 않습니까? 어디서 만나면 어떻습니까? 그런데 하필이면 갈릴리겠습니까?

 

그래서 요한복음 21장으로 가봅니다. 디베랴 바다 가에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제자들 가운데서 다른 두 사람이 한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그러자 그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고 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배를 탔습니다. 그러나 그 날 밤에는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난감하겠습니까? 그야말로 막막한 겁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애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대답합니다. “못 잡았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리하면 잡을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지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서, 그물을 끌어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가 말했습니다. “저 분은 주님이시다.” 그 말을 들은 베드로는 벗었던 몸에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내렸습니다. 예수님인 것을 알아본 겁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습니까? 밤새 고기를 못 잡았는데,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깊은 곳에 그물을 던졌다가 엄청 많은 물고기를 잡은 이야기. 예, 누가복음 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 5장, 예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셨습니다. 디베랴나, 게네사렛이나 다 갈릴리 주변의 동네이름들입니다. 그렇기에 디베랴 바다나 게네사렛 호수는 모두 갈릴리를 말하는 겁니다. 그 때에 배 두 척이 호숫가에서 대어 있고 어부들이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시몬의 배에 올라서, 시몬에게 뭍에서 조금 떼어놓으라 하시고, 배에 앉으셔서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면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으나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대로 하니, 많은 고기 떼가 걸려들어서,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을 불러서 두 배에 가득 채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서 말합니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배를 뭍에 댄 뒤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그랬습니다. 그 갈릴리 호수에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제자들은 그것을 잊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낙심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제 그 때의 일을 다시 경험합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그 감동과 기쁨을 다시 경험합니다. 사람을 낚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나섰던 그 때를 다시 생각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했던 그 때를 다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다시 생각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과거를 회상하며, “그 때가 참 좋았었지”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 때의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겁니다. 그 때의 그 감동을 다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때의 부르심에 대한 감동을 다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일어서는 겁니다.

 

처음에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늘 수수께끼 같은 거였습니다. 도대체 사람을 낚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만남에서는 그것이 분명해졌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는 겁니다. “내 양을 치라”는 겁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그리하라고 하시기 전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내가 너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5장, 처음엔 몰랐습니다. 어쩌면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해주어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알 수 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사랑하라는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심지어,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일흔 번씩 일곱이라도 용서하라고,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에서 하신 말씀,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마셔라”하신 말씀이 무엇인지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제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생명을 걸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합니까? 예, 사랑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디베랴 바다에서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있었던 처음 사랑의 회복했습니다. 진정한 사명을 부여받습니다. 이 사랑이 베드로가 베드로 되게 한 것입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죄인 중의 괴수라고 말했습니다. 때로는 다마스쿠스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가다가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이야기도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처음 만난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사랑하심을 처음 경험했던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때때로 힘들 때마다 이것을 돌아다보고 사랑을 회복했습니다.

 

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이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이 왜 재미없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왜 짐입니까? 예배 시간이 왜 지루한 시간입니까?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을 믿으면서 왜 우리는 남을 사랑하지 못합니까? 왜 용서하지 못합니까? 기도는 신나고 즐거운 일입니다. 주님께서 응답하겠다고 약속하셨으니까요. 그런데 왜 기도하지 못합니까? 왜 낙심합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인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데…. 그래서 사람을 낚는 직분을 받은 사람인데…. 그런데 왜 낙심합니까? 예, 그 모든 사랑과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임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자녀로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의 노예로 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3:14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처음 믿을 때에 가졌던 확신을 끝까지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을 함께 누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영원한 구원에 이릅니다. 그렇기에 처음 믿었던 믿음을 굳게 지키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때마다, 순간마다 경험했던 하나님의 능력, 은혜, 사랑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이제는 아무리,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해도 시큰둥합니다. “사랑은 무슨 사랑.” 볼멘소리만 합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믿음을 잃어버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잃어버립니다. 신앙생활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인데, 이제는 ‘무엇을 하느냐?’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하느냐?’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빠져버린, 그 감격과 기쁨과 은혜가 빠져버린, 그 엄청난 사랑을 잃어버린, 그래서 자기의 공로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그래서 신앙이 짐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의 감동만 간직했어도…. 좌우에 물 벽이 서있는 그 가운데를 건널 때의 감동만 간직했어도…. 홍해를 건너서 그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던 감동만 간직했어도…. 광야를 걷는 동안 겪었던 어려움과 그 어려움에서 경험했던 하나님의 은혜만 기억했어도…. 블레셋을 물리쳐서 승리를 주신 그래서 에벤에셀의 기념비를 세우던 감동만 기억했어도…. 흘러넘칠 정도의 물줄기가 멈춘 요단강을 걸어서 건너고, 그 요단강 가운데 돌 열둘을 가져다가 기념비를 세우던 그 감동만 있었어도…. 그러기만 했었어도….

 

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게 처음 주님을 만났던 그 감동만 잊지 않았더라도…. 어렵고 힘들 때 찾아오셔서 위로와 새 힘을 주시던 그 감동만 잊지 않아도…. 죽을 고비에서 울며 기도할 때 건져주신 그 사랑을 잊지 않았더라도…. 그렇게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하고 있었더라도…. 그러기만 했었어도…. 그래서 그냥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이 살아온 날들이 아쉽습니다.

 

그랬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죄의 노예였습니다. 죄의 노예, 그것이 우리의 본질이었습니다. 그래서 죄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 우리의 본질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자녀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처음 사랑을 회복 때 가능한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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