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푯대를 향하여 나아가는 삶(2018.3.29.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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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주제일교회 작성일 18-03-29 15:42 조회 134 댓글 0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는 삶(빌립보서 3:1-16)

 


오늘은 고난주간으로 따지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신 날입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어주시고 수건으로 닦아주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감히 그런 발 씻음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주님께서 내 발을 씻기시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는 일을 지금은 네가 알지 못하나,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가 다시 말합니다. “아닙니다. 내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 이래서 저는 베드로가 마음에 듭니다. 확실하게 자신을 표현한다고 하는 것도 그렇지만, 솔직하기 때문입니다. 스승이십니다. 그런데 그 스승께서 제자인 자기 발을 씻기는데 좋다고 발을 내밀 수는 없잖습니까? 더구나 베드로에게 있어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발을 씻기신다고 냉큼 발을 내밀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님, 내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까지도 씻겨 주십시오.”

 

그렇게 해서 모두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알겠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옳은 말이다. 내가 사실로 그러하다.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그러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남의 발을 씻겨주라고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꼭 발을 씻겨주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섬김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스승이지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준 것과 같이 낮은 자리에서 남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주님이면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 같이 그렇게 남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무엇입니까?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 섬기신 것도 우리가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또한 섬기는 것도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함입니다. 사실, 남을 섬긴다고 하는 것, 그것이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정말로 구원과 상관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곧 구원과 상관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을 얻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셨습니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그 아버지의 뜻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반드시 구원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구원을 얻기 위함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함입니다. 죽도록 신앙생활을 하고, 죽도록 애를 썼다고 해도 구원을 받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천하를 얻고도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10-11절, “내가 바라는 것을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어떠세요?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이런 마음이세요? 정말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이 여러분이 바라는 것입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까? 이것이 아니라면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는,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겁니다. 5-8절, “나는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왜 그랬습니까? 9절,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나는 율법에서 생기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를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와 비교해서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님보다 더 좋은 것이 있습니까? 영원한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있습니까?

 

그런데요, 이것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구원을 얻고자 하는 우리에게는 주님의 요청이 있습니다. 부자청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걸렸습니다. 그것은 도무지 그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단지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리는 것 아닙니다. 그렇게 이웃을 사랑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하고, 그러려면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냥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갖고 싶어 하는 것을 그는 다 버렸습니다. 아니, 버릴 정도가 아니라 오물로 여겼습니다. 버리는 것은 다시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물이 된 것을 찾아올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내게 묻을까 싶어 피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께서는 그렇게 예수님 외에는 다 버렸습니다.

 

또 하나는, 모든 삶의 목표를 오로지 구원에 두었습니다. 12-15,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숙한 사람은 이와 같이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무엇인가를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도 여러분에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구원과 상관이 없는 상급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고, 또 다른 상급이 각 사람마다 다르게 주어지는 줄 압니다. 그래서 열심히 충성하면, 열심히 신앙생활을 잘 하면, 하나님 앞에서 남보다 좋은 상급을 받는 줄 압니다. 그러나 여기,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은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구원입니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나는 부활입니다.

 

만약 상급이 있다고 합시다. 그것이 금메달이든, 아니면 상금이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금 모자, 은 모자, 개털모자, 그런 건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푯대도 분명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구원입니다.

 

사람마다 누구나 나름대로의 푯대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세상적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사라지기도고 합니다. 있다가 없고, 없다가도 있고 그럽니다. 아니면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에 다 놓아야 할 것들입니다. 어렸을 때에 동네 어른 장례식을 보았습니다. 상여가 만들어지고, 출발하기에 앞서 작은 상을 차려놓고 이제 마지막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상여가 떠날 때에 동전을 몇 개를 상여 앞으로 던집니다. 저승까지 가는 동안 여비하라고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묘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그 어른이 평생 얼마나 많은 일을 했고, 그래서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들였는데, 달랑 동전 몇 개 던져주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동전 몇 개도 그 어른이 가져가는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주워갔습니다. 그 어른은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그가 사는 날 동안 꿈꾸었던 것, 그렇게 애지중지 하던 것, 그토록 죽을 둥 살 둥 애쓰던 것, 그 어느 것 하나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공수래공수거.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디모데전서 6:7에도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아무것도 가지고 떠나갈 수 없습니다.” 그 외도 많은 말씀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4:14,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 1:24-25,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복음으로 전해진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3:1 이하에 나오는, 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 그래서 구걸하는 사람은 그렇기에 돈이 가장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의 말,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여기, ‘은과 금’ 그리고 ‘일어나 걷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소중합니까? 어떤 사람은, “그래도 난 은과 금이다”라고 할 겁니다.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늘 걷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하루를 살아도 걸어보다가 죽고 싶은 겁니다. 우리 아직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구원에 대한 실감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5장의 어리석은 다섯 처녀를 보면서 그래도 깨달음을 가지십시오. 신랑과 함께 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닫힌 성 문 앞에서 “주님, 주님, 문을 열어주십시오.”하고 부르짖는 그 마음이 어떠한가를….

 

창세기 47:9, 이집트 바로가 야곱에게 물었습니다. “어른께서는 연세가 어떻게 되시오?” 야곱이 바로에게 대답했습니다.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 년 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언젠가 우리는 다 세상을 떠날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삽니까? 결국은 죽으려고 사는 겁니다. 누가 먼저 죽고, 누가 나중에 죽는 순서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푯대는 세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푯대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시는 위로부터 부르신 부름의 상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푯대 곧 구원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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