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함께
행복한 교회, 행복한 가정, 행복한 사회





예배와말씀
목회단상    |  예배와말씀  | 목회단상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시는 하나님(2017.1.2. 새벽)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으로 보내기
  • 밴드로 보내기
작성자 진주제일교회 작성일 17-01-04 11:16 조회 207 댓글 0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시는 하나님(히브리서 11:23-31)
 
찬송/ 446장
 
히브리서 저자는 모세의 두 가지 믿음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이방 나라 이집트의 영광보다 자기 민족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집트의 모든 재물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을 받는 것을 더 큰 재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고난을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능욕을 재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 고난과 능욕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럼으로 해서 모세는 더욱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동행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모든 믿는 사람에게 믿음의 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로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이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이 모세를 부르셔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 당신의 민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는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어떨 것 같습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일에 쓰시려고 부르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주십시오.” 그리 할 것 같습니까? 아니면, 요리 조리로 빠져나가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이때까지는 우리가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쓰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신다면 그 일을 영광일 것 같지요?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 같은 그런 영광은 아닙니다. 모세가 그랬습니다. 부름을 받은 이후 광야 사십 년 동안, 아니 이집트에서부터 그 백성들은 사사건건 말썽을 피웠습니다. 뭐 하나 고분고분 따라나선 적이 없습니다.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나가 하나님께 예배하겠다고 말했다가, 오히려 일거리만 더 늘어나자, 백성들은 아우성을 쳤습니다. 이집트를 나와서 홍해 앞에 섰을 때에도 아우성을 쳤습니다. 여기까지 끌고 나와서 죽일 거냐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는 갈라놓으셔서, 그 바다 밑을 걸어서 건넜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물이 써서 못 먹게 되었다고 또 아우성칩니다. 하여간 이런 일의 반복입니다. 아마 우리 같았으면 벌써 팽개치고 말았을 겁니다. 그래도 모세니까 끝내 참고 그들을 이끌어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 앞에까지 인도한 겁니다. 민수기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 새 번역, “모세로 말하자면,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겸손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그에게 덤벼들었습니다. 죽이려고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일은 언제나 고난 받는 길이요, 능욕을 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쩌면 모세 역시 그랬을 겁니다. 그가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엔, 더욱 갈등이 심했을 겁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런 고난을 당한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면 결코 이럴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럴 때에 선뜻 나서겠습니까?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압니다. 알아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일이라고 해서 선뜻 나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서 기쁘게 하려고 합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고,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믿으면서도, 어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려고 합니까? 그러니 모세는 오죽하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하고,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믿을 수 없습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이 모양으로 만드시고 이제는 구원하시겠다고요?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에 선뜻 나설 수 없는 겁니다.
 
출애굽기 3:10,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나는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게 하겠다.” 그러자 모세가 대답합니다.  11절,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겠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그래서 모세가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저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을 터인데, 제가 뭐라고 그들에게 대답해야 합니까?” 쉽게 말하자면,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겁니다. “정말 당신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실 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까?” 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셨습니다. “여호와” 이 말은, “나는 곧 나다”라는 뜻입니다. 그리스어로 기록된 성경 칠십인 역에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어는, “나는 되고자 하는 대로 될 나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것이 있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창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에 아무도 하나님을 도울 자 없었습니다. 하나님 홀로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이 분이 ‘여호와’ 곧 ‘나는 곧 나다’라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것을 믿는 겁니다. 그러자 모세는 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발견합니다. 말도 잘 할 줄 모릅니다. 능력도 없습니다. 바로의 왕궁에서 살 던 기억도 희미하고, 지금은 광야 사십년 동안 양떼를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었습니다.
 
보십시오. 어떻게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고 하는 영광스러운 자리를 포기할 수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모세는 백성들과 함께 고난을 받는 길을 택할 수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모세는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을 일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모욕을 이집트의 재물보다 더 값진 것으로 여길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그가 비로소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 긴 광야 사십 년의 별의별 일을 다 겪으면서도 온유할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입니까? 역시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그랬습니다. 어떻게 그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겠다고 모리아 산에 오른단 말입니까? 그것은 그가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모든 사람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자신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큰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까지 살아온 것은 누구의 능력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금년 여기까지 살아온 것은 누구의 은혜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순간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오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고 말할 겁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문제는 이 믿음입니다. 믿는다고 할 때에, 많은 사람들은 자기를 믿습니다. 내가 이 정도나 되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신다고 행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신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믿음입니다. 보십시오. 그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이끌어낸 모세는 위대합니다. 그러나 모세를 붙드셔서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신 하나님은 더 위대하십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것을 믿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자기의 연약함을 믿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생각해봅시다. 기도하면 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사람하고, 기도했는데도 이루어지지 않아 힘들어 하는 사람, 이 둘 중에 누가 믿음이 더 좋습니까? 당연히 우리는 기도하면 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사람이 더 믿음이 좋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기 몸에 있는 육체의 가시를 빼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는데 그대로라고 말합니다. 기도의 응답이 없었던 겁니다. 그러면 바울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12:9b-10,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4:7에서 자신을 뭐라고 비유합니까? 쉽게 깨지는 ‘질그릇’이랍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이 담겨 있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라고 외칩니다. 비록 기도의 응답은 없었지만, 여전히 육체의 가시는 그대로 남았지만, 그래서 여전히 질그릇 같은 존재이지만, 그래도 그가 당당한 것은 주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미천한 사람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이 때까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신 여러분, 2017년 새해를 더욱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십시오. 미천한 우리지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시고, 당신의 거룩한 일에 우리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찬송가/ 545장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주일설교 [1]
금주의 찬양
교회주보

인사말씀

비전및표어

예배안내

교회연혁

섬기는분들

오시는길

포토앨범

교회소식

행사일정